현대인의 삶이라는 것이 쉽고 빠른 생활의 이기에 오히려 구속당한 채 하루하루 바삐 살다보면 '전통'이라는 것이 무던히 그리워질 때가 있다.

에어컨 대신 차가운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나마 무구한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생활은 각박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꿈꾸었음 직한 이상이다.

이같은 이상은 국내에 얼마 남지 않은 전통마을에서 실현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전통마을을 찾는다. 이 때문인지 종종 '전통'과 '여유'는 동일 선상에 놓인다.

울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전형적인 양반마을의 입지와 가옥이 보존된 전통마을로 안동 하회마을보다 규모가 크다.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의 집성촌이기도 한 양동마을은 150여 가옥과 360여 채의 건물, 관가정과 독락당 내 계정(溪亭) 등 15개의 정자가 있어 하루 일정으로는 대충 구경하기도 어렵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명당이다. 이는 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면서 명당의 입지 조건을 갖춘 하회마을과 다른 풍수지리적 형태를 나타낸다.

대체로 조선시대에 마을을 형성할 수 있는 풍수적 구조는 최소한 30~50채의 가옥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하고, 사신사(주작, 현무, 청룡, 백호산)가 울타리처럼 둘러싸면서 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풍수전문가 강상구씨는 "청룡산과 백호산 사이로 명당수인 냇물이 흐르고 그 너머로 큰 강물이 객수(客水)가 되어 흐르고 있으면 배산임수형 명당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양동마을은 대표적인 '말 물(勿)자'형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주산인 무척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의 형태가 '물(勿)'자와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척산을 중심으로 각 산줄기마다 여강 이씨 종택인 무첨당(보물 제411호), 여강 이씨 둘째 종가인 향단(보물 제412호), 월성 손씨 둘째 종가인 관가정(보물 제442호) 등 수많은 옛 건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양동마을 앞을 지나는 경주 포항간 철도도 풍수 연구가들에게는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과거 일제가 양동마을의 정기를 끊기 위해 마을 앞으로 철로를 개설, 물(勿)자를 피 '혈(血)'자로 바꿨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양동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의 기복과 토질의 살찌고 야윈 형태를 실제 살펴보면 배가 불룩하게 나와 마치 임신한 산모의 모습을 닮았다는 풍수적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같은 해석의 근거는 월성 손씨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의 위치이다. 형국론적으로 생산을 하는 자리에 위치한 서백당에는 아이를 낳을 때 사용되는 태실이 안채 우측에 있다.

이 곳은 큰 인물 3명 나온다고 전해지면서 손씨 가문에서는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이 곳에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우재의 조카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났다.

우재 손중돈는 벼슬이 정2품 우참찬까지 올랐으며, 동국 18현중 하나로 종1품 좌찬성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은 성리학을 정립해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기틀을 만든 인물이다.

이언적은 손중돈에게 학문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월성 손씨 가문은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됐다"고 주장했고, 여강 이씨 집안이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손씨 가문은 회재 이언적 출생 이후 남은 한명의 큰 인물을 손씨 가문에서 내기 위해서 시집간 딸이 서백당에서 해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서 풍수적으로나 역사·문화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무첨당'이다. 여강 이씨 종택인 무첨당은 이언적의 부친 이번(李蕃)이 살던 집으로 보물 제411호로 지정돼 있다.

이번이 양동에 장가들어 기반을 잡은 뒤인 1508년에 살림집을 세웠고,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에 이곳에 들러 별당인 무첨당을 건립했다. 무첨당이라는 이름은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李宜潤)의 호를 딴 것이다.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한다'는 뜻으로 종가로서 무첨당의 의도는 매우 강렬하고 직선적이다.

무첨당에는 대원군과 관련된 일화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 여강 이씨 가문은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양동에 왔을 때 후하게 왕손 대접을 했다.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여강 이씨라면 검토해 보지도 않고 등용을 시켰다고 한다.

풍수적으로 무첨당은 임신한 배 부분의 정혈 자리에 위치한다. 임신한 배에 위치하는 혈이 갖는 발복으로는 부자, 다손, 평안, 안정적 발전, 장수 등이 있다.

양동마을은 원래 손소(孫昭)라는 사람이 월성 손씨 종가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그러나 손소의 딸이 여주 이씨 집안에 출가해 이언적을 낳게 되고, 여주 이씨가 여강 이씨로 개칭해 종가를 이루면서 여강 이씨가 번성했다.

강상구씨는 "현재 양동마을에는 여강 이씨 가옥수가 월성 손씨보다 두배 이상 많다"며 "이는 무첨당의 풍수적 발복에 따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움말 강상구 풍수전문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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