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수필문학회가 최근 러시아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처용수필문학회는 지난해에도 영국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와 본보에 기행수필을 실어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도 처용수필문학회의 러시아 기행수필을 10차례에 나눠 싣는다. 세계 문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 문학의 현장을 엿보는 즐거운 경험이 되기를 기대한다.

책장에서 평소 손대지 않았던 책 한 권 뽑아 든다. '컬러판 세계(世界)의 문학(文學) 대전집(大全集)' 중 하나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罪)와 벌(罰)'이다. 붉은 색의 두꺼운 표지가 바래다 못해 누렇게 변색되었다. 책장을 넘기니 묵은 곰팡내 때문인지 재채기가 난다. 깨알같은 글자로 이단의 세로 읽기로 짜여 있다. 띄엄띄엄 오랜 세월로 번져간 낙서를 보니 옛 기억이 새롭기는 하지만 이런 책을 어떻게 읽었는가 싶다.

돌이켜 생각하니 당시에는 집집마다 장식을 겸하여 이런 종류의 전집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겨드랑이에 세계적 문호들의 책 한 권 정도는 늘 끼고 다니면서 사춘기적 감상에 젖곤 했던 것 같다. 그때를 생각하니 허허로운 웃음이 절로 나왔으나 그리 싫지는 않았다.

빈 웃음과 함께 기억을 더듬으니 소설의 줄거리조차 희미할 뿐더러 주인공들의 긴 이름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에도 러시아 문학은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숲같이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만큼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그 느낌조차 까마득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데 그 흔적들을 더듬으며 철의 장막 속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 기행! 그것은 문학적 광기(狂氣)와 우연의 결단이었다. 동인들의 점심 자리에서 농반진반의 세계 문학 기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농반의 이야기들이 장난처럼 구체화되면서 결국 3,000㎞의 영국 여정으로 세계 문학 기행의 제1장을 쓰게하였다.

러시아 기행 역시 영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비롯되었다.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창밖에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이 눈에 들어 왔는데 거기가 바로 시베리아 대평원이라는 말을 듣고 누군가의 입에서 내년에는 러시아에 가자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영국 여정에서의 황홀한 감동 탓인가. 영국 기행이 끝나자말자 이희자 동인이 추진위원장이 되어 러시아 문학기행을 위한 적립금 마련에 들어 갔던 것이다.

영국에 이은 러시아 문학기행. 부자의 사치가 아닌 문학의 사치를 누리는 내 팔자가 더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책으로 느껴오는 감동이 뇌를 흔드는 자극이라면 작가가 숨 쉬고 살았던 땅에 발 한 번 디디고 그들의 입김으로 스친 바람에 숨 한 번 들이키며 보고 느끼는 감동은 가슴을 저미는 전율이 있기에 그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사치가 아닌 것이다.

그런 사치를 만끽하기 위해 올해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 관련 전문가가 필요했고 만만치 않은 경비도 문제였다. 러시아 관련 전문가는 작년의 영국 문학 기행에서의 인연으로 '처용수필' 최초로 국외 거주 동인이 된 영국의 권석하 동인이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사실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러시아에서의 모든 일정을 맡겼고 경비는 매월 조금씩 적립하며 준비하였다.

출국 전 러시아 역사와 문학을 중심으로 100쪽 분량의 '러시아문학기행자료집'을 따로 발간하여 미리 공부를 하였고, '처용수필러시아문학기행'이라는 플래카드도 제작하였다. 비행기 예약과 동인들의 사정에 따라 여러 번의 일정 변경을 거쳐 러시아 문학 기행 계획이 최종 확정되었다. 모스크바와 페테스부르그를 중심으로 고골, 고리키,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홉 등의 러시아 대표 문학인을 중심으로 6박 8일의 일정을 잡았고, 여기에는 신원호 초대회장을 고문으로, 송철호 회장을 단장으로 하여 총 12명의 동인이 참가하였다.

백야(白夜)의 신비를 간직한 나라. 광활한 영토에 70여 세계 최대 다민족들의 긴 역사를 간직한 나라. 자작나무 숲에서 나서 자작나무 숲으로 돌아간다는 그 비밀의 숲으로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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