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지리산 천황봉 아래서 남명선생 헌다제와 주역강의가 있었다. 벌초 가는 친구와 남명(조식) 선생을 봄에 이어 다시 찾았다. 선생은 퇴계와 더불어 영남 사림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25세에 성리대전을 읽다 크게 깨치고, 서른에 처가가 있는 김해(탄동)로 와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공부에만 정진하고 관직엔 일체 나가지 않는다. 경상감사로 온 회재(이언적)가 불러도 응하지 않는 고집도 부린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고향인 산청(삼가) 토동에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여러번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니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풍수실력을 발휘해 지리산 기슭 산청(61세)에다 그의 서당인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쓴다. 특이한 사실은 남명은 그 옛날에도 명당을 찾아 여러번 서당을 옮긴 일이다. 선조 임금이 여러번 불렀지만, 상소문(戊辰對事)으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펼쳐 관리들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해 유명해 진다.

남명의 사상은 무위자연의 노장적 요소도 다분했으나, 먼저 나를 닦은 후 남을 지도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다. 그가 늘 차고 다니던 방울과 칼엔 경·의(內明者敬 外斷者義)란 두 글을 새겼듯, 그의 철학은 바로 만사를 공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리(義)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가는 철학이었다.

선생은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그렇다고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의지도 보여 준다.

난세에는 처사로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이 투철하였고, 비리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선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 학풍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학을 진흥시킨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한 선비의식도 보여주었다.

그의 문인들은 퇴계의 경상좌도 학맥과 거대한 두 봉우리를 이루었지만, 선조 시절엔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남인과 북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또 정인흥 같은 제자가 광해군 때 대북파 당수인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하니, 선생의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자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남명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일대기를 영화로 볼 정도이다. 선생의 마지막 강의실 산천재에서 주역강의를 종일 듣고 선생의 묘소를 돌아 덕천서원으로 갔더니 마당에 차나무가 아름드리 자라고 있었다. 외롭지 않은 선생, 주역은 이런 경우를 경의입이덕불고(敬義立而德不孤)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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