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한 가톨릭신자였으며 오페라 '파우스트'로 유명한 작곡가 구노(1818~1893)는 프랑스 파리 근처인 생클루라는 곳에서 화가인 아버지와 유능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일반 학교를 다녔으며, 철학으로 학위를 딴 뒤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1770~1836)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승인 라이하가 죽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3년 뒤 칸타타 '페르낭(Fernand)'으로 로마 대상을 받고 3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공부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겸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고, 2년 동안 주로 신학공부에만 열중했다. 1846년에는 성직자의 꿈을 안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포기하고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교음악과 세속적인 작곡방식을 혼합해 보려고 했다. 초기 오페라는 베를리오즈가 호의적인 평론을 써 주었는데도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 후 희가극 쪽으로 잠시 방향을 바꾸었다가 1852년부터 '파우스트'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59년 3월에 초연된 이 작품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의 그늘에 가려 구노가 그 후에 작곡한 오페라들은 오늘날까지도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파우스트'가 파리의 리릭극장에서 초연됐을 때에 그 당시 파리 사람들은 비극적인 내용을 즐기지 않아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 후 1869년 제 5막의 처음에 무용음악을 첨가하여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상연했을 때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곡은 바그너가 같은 소재로 한번 기량을 겨루어 보려다가 결국 단념하고 말았을 정도로 걸작이었다. 그리하여 오페라'파우스트'는 파리에서만 1919년까지 1500회 이상 공연했으며, 메트로폴리탄에서도 1883~1943년 사이에 268회의 공연을 기록하게 되었다.

구노의 공로로는 아리아 중심이었던 당시의 가극을 개혁했다는 점과 투명하고 신선한 선율, 섬세한 독창성, 균형 잡힌 구성 등을 들 수 있으며, 이것은 뒤를 이은 프랑크, 비제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선율은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독창성이 뛰어나며 성악곡과 관현악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 1권 중 전주곡에 덧붙인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작곡가로서 독창성, 여유, 표현상의 순박함을 보여주는데 그의 음악이 1920년대 신고전주의 음악가들에게 명성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순박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노가 '순박한' 작곡가라는 이유로 그를 존경했으며, 특히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시학'이라는 책에서 그의 작품들을 찬미하고 있다.

오페라 '파우스트' 전곡을 들을 기회는 흔치 않겠지만, 오페라 합창곡인 제 4막 제 3장의 남성 합창곡 '병사의 합창'이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의 아리아 '보석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것만으로도 구노의 음악세계를 어느정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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