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金就礪 1172-1234). 고려 후기의 무신. 시호는 위열(威烈). 본관은 언양. 신라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인 언양군(彦陽君) 김선(金鐥, 언양김씨 시조)의 후손. 아버지는 예부시랑 부(富)이다.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에서 태어났다.

음서제도(문음,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후광으로 관리를 채용하는 제도)에 의해 정위(正尉)에 임명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동궁위를 거쳐 장군이 되고, 동북계를 진수한 뒤 대장군에 발탁됐다. 재상인 시중(侍中)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 "장군의 풍모는 키가 6척5촌, 수염은 배 아래까지 내려와 조복을 입을 때 수염을 나누어 들게 한 다음에야 띠를 맸다"고 적혀 있다. 사람됨이 검소하고, 충의를 신조로 삼았다. 군대를 통솔할 때는 명령이 엄격했다. 1216년부터 1219년까지 거란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능골에 언양 김씨 재실이 있고, 그 우측 산입구에 1867년(철종 8년)에 세웠다는 '김취려장군태지유허비'가 있다. 이 태비에서 우측으로 화장산을 오르면 '위열공 김취려의 묘'(울산기념물 제7호)가 있다. 묘 앞으로는 1670년(현종 11년)에 찰방인 12세손 김려와 언양현감 강응이 세웠다는 묘비와 대리석 제단, 석등, 문인석, 무인석이 차례로 세워져 있다.

김취려가 활동하던 13세기 초.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는 몽고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1206년 징기즈칸은 몽고제국을 세워 유리시아 대륙 정복에 나섰다.

중국 남부에 있던 남송, 북부와 만주지역의 금, 몽고 서쪽의 서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금의 정복에 나섰다. 그 무렵 금의 지배를 받던 야율유가가 자립하여 요왕이라 칭했다. 이에 금은 포선만노로 하여금 야율유가를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포선만노는 진압에 실패하고, 스스로 자립의 길을 택했다. 야율유가를 쫓아낸 것은 거란의 금산, 금시왕자이다. 이들은 중국의 하, 삭지방에 압력을 가하면서 1216년(고종3년)에 대요수국을 세웠다. 그러나 몽고의 대 병력에 의해 토벌당했다.

금산, 금시의 잔여세력은 동으로 이동했다. 금의 군대와 싸우는 한편 고려에 사람을 보내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북계(北界)의 병마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식량을 보내 우리를 돕지 않으면 반드시 고려의 강토를 침범할 것이다. 우리가 며칠 후에 황색 깃발을 올릴 것이니 그곳으로 와서 황제의 명을 받으라. 만약 오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취하겠다."

며칠후 황색의 깃발이 올랐으나 병마사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튿날 금산의 부하장수 아아걸이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영삭 등의 진을 공격해 왔다. 아아걸의 병사들은 성 밖에 있는 주민의 재물과 곡물, 가축 등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다음날에는 의주, 정주, 삭주, 창주, 운주, 연주 등의 고을과 선덕진, 정융진, 영삭 등 각 진에 침입했다. 처자까지 데리고 와서 마음대로 알곡을 거두고 마소를 잡아 먹으면서 한 달 이상을 거주했다. 먹을 것이 없어지자 운중도로 옮겨갔다.

이때 고려에서는 노원순을 중군, 오응부를 우군, 김취려를 후군 병마사로 각각 임명했다. 3군은 만3천명의 군사와 신기군을 통솔하여 청천강 일대에서 약탈행위를 일삼던 거란족을 소탕했다. 3군 중에서도 김취려가 이끄는 군대가 매번 선봉에 섰다. 김취려는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김취려의 후군은 양주에서 적군을 만나 수십명을 살해했다. 치중부대를 보위하면서 천천히 행군, 서현포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또 다시 공격해 왔다. 김취려는 중군과 우군에게 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군은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해 응하지 않았다. 김취려는 홀로 싸워 힘겹게 적을 물리쳤다.

박주에 도착했을 때 중군의 노원순이 서문 밖까지 영접을 나와 치하했다.

"갑자기 강적을 만났는데 적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3군의 짐을 운반하는 부대의 병사로 하여금 자그마한 손실도 없게 하였으니 모두가 당신의 덕이요."

노원순은 마상에서 술을 부어 김취려와 축배를 들었다. 양군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도 절하며 말했다.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이 매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적은 병력으로 매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노약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여주니 그 은덕을 생각하면 보답할 길이 없으나 오직 장군의 축수를 드릴 뿐입니다."

김취려는 적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잃은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묵장(지금의 영변)전투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김취려는 자식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진 깊숙이 말을 몰고 들어가 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김취려가 이끄는 후군의 활략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군과 우군이 점차 적군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날씨까지 추워져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적은 이 틈을 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로 쳐들어 갔다. 개경을 위협하면서 주변 지역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1217년 3월(고종4년) 김취려는 전신에 창과 화살을 맞아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 그해 5월 적군이 한강 이남으로 남하했다. 7월 김취려는 전군 병마사에 올라 제천 박달재 싸움에서 수만의 적을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패하자 적군은 남하계획을 포기하고 함경도 여진지역으로 달아났다. 10월 적군이 여진의 구원병을 얻어 쳐들어 왔다. 그러나 이때 김취려는 병이 들어 개경에서 여러 달을 치료했다. 그 사이에 수십개의 성이 함락되고, 고려군은 대패했다.

1218년(고종5년) 7월 김취려는 병마사에 다시 임명됐다. 1219년(고종6년) 2월 김취려는 몽고군 등과 공동작전으로 강동성을 함락시키고 거란을 섬멸시켰다. 병마사 한광연과 장군 1명과 함께 신기군, 대각군, 내상군 등 정예병력을 이끌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는 몽고군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1220년(고종7년)에 의주의 한순과 다지가 수비장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여러 성을 점령했다. 김취려는 추밀부사 이극서, 장군 이적유 등과 이를 토벌했다. 김취려는 추밀부사가 됐다.

1221년(고종8년)에 추밀사 병부상서 판삼사사를 거쳐 참지정사 관우부사가 됐다. 1228년(고종15년)에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서판병부사, 그리고 마침내 최고 관직인 시중에 이르렀다. 1234년(고종 21년) 몽고의 침입이 한창인 때에 김취려는 임시수도인 강화도에서 사망했다. 위열공 시호가 봉해졌으며, 고종 묘정에 배향됐다.

현재 김취려의 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화장산과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진강산 두 곳에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병감>에 "1234(고종 21년) 5월 강도(江道)에서 서거했으나 고종이 친히 빈소에 나가 조의를 표하고 3일간 정사를 중지했다"고 쓰여 있다. 언양은 음력 10월10일, 강화는 음력 10월에 각각 기일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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