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가야산기'를 따라간 해인사

'문학기행'이 어느새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문학기행의 대중화도 한 원인이겠지만 활자매체가 점점 매력을 잃어가면서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이 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라면 옛글의 정취와 현대글의 치열함이 녹아있는 풍경도 늘 새롭게 변모할거라 믿는다. 다시 한번 신발끈을 조여맨다.

임인년 2월18일, 아침밥을 일찍 먹고 출발해 거창으로 갔다. 가조촌에서 말을 먹였으며 여기서 30리 되는 합천 해인사에서 유숙했다. … 절에 도착해 궁현당에서 쉬는데 스님이 꿀물과 대추, 감 따위를 내왔다. … 촛불을 켜들고 대적광전을 구경했다. 스님이 학식이 있고 지혜로워 이야기할만했다.

(대적광전에는) 면이 하나만 있는 북이 있는데 … 스님은 '이것이 애장왕(신라 제40대 임금) 때 악어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소가죽이 분명하다. … 법당 북쪽에는 보안당이 있는데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곳이다. 남북의 두 각은 다 같이 15칸이고 너비가 각각 3칸으로 모두 90칸이다. 한 가운데에 3층으로 칸막이를 하고 대장경 경판을 즐비하게 꽂아 놓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서쪽 높은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해인사의 경내를 다 볼 수 있다. … 홍류동과 낙화담의 폭포는 하얗게 떨어지고 물에는 녹음이 잠겼으며 나무와 돌이 모두 성낸 듯하고 연하(煙霞)도 사람을 싫어하는 듯 하다.

이덕무 '가야산기' 중에서

가을산은 비쩍 말라보인다. 지천으로 물든 붉은 잎들이 선지처럼 뚝뚝 떨어진다. 다 떨어지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 부대끼며 추운 겨울을 나야한다. 가을산의 월동준비는 너무 요란해서 안쓰럽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복잡하다. 산문 초입부터 쉴새없이 차와 관광객이 오르내린다. 홍류동 계곡의 차가운 물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다. 절 안을 휘휘 둘러보고는 도토리묵 안주삼아 막걸리에 얼근히 취한 관광객들이 해인사의 가을을 덧칠한다. 더러 볼썽사납지만 이 게 가을산을 대하는 우리의 평균치 삶인 것을. 심드렁하게 무심해질 뿐이다.

200여년 전 간서치(看書痴·책만 읽는 바보)라 불렸던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1741~1793)도 무심한 표정으로 해인사를 다녀갔다. 이덕무는 임금이 보낸 순찰사를 맞으러 가는 길에 해인사를 들른 뒤 '가야산기(伽倻山記)'를 썼다.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전한다.

조선 임인년(정조 6년, 1782) 2월18일 이덕무는 거창을 출발, 가조마을을 지나 해인사에 갔다. 가조마을은 해인사 가는 길에 아직 그 이름이 남아있다. 가조마을에서 해인사까지는 30리, 약 12㎞이다. 가야산으로 들어가는 해인사 산문을 지나면 돌이 우뚝 서있고 계곡물이 흘러 아늑하다. 이 곳에서 그는 '놀란 사슴이나 도망치는 노루 같이 빠른' 나무꾼을 만난다. 이제 나무꾼은 없다.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이 줄을 이어 내려온다.

해인사는 산문에서 꽤 올라가야 한다. '사람은 공중에서 말하고 말 울음소리는 구름 밖에서 들렸다'고 이덕무가 그러더니, 정말 그랬다. 가야산 깊숙이 움푹 패인 곳에 해인사는 자리하고 있다. 해인사에 도착한 그는 촛불을 켜들고 대적광전을 구경한 뒤 궁현당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궁현당은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있다.

이덕무가 해인사에 도착한 다음날 2월19일 밤에는 비가 내렸다. 낮동안 그는 대적광전과 팔만대장경이 보관중인 보안당(普眼堂)을 둘러본다. 보안당은 현 장경각의 옛 이름으로 보인다. 그는 보안당을 둘러보며 "남북의 두 각은 똑같이 15칸이고, 너비는 각각 3칸으로 모두 90칸이다. 한 가운데에 3층으로 칸막이를 하고 대장경 경판을 즐비하게 꽂아 놓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고 썼다.

우리나라에는 삼보(三寶)사찰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통도사는 불보사찰이고,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다. 흔히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지난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유네스코 등록 유산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장경판전'이다. 팔만대장경은 국보 32호, 해인사대장경판전은 국보 52호이다.

그는 일기형식으로 해인사에서 지낸 경험을 썼다. 당시 실학자들의 글쓰기처럼 있는 사실에 충실했다. 천년고찰에 대한 감상이나 경외감은 없다. 담담할 뿐이다. 그는 고지(古志)에 전하는 팔만대장경 제작 연도와 '벌레와 새가 감히 깃들지 못하고 먼지가 끼지 않는다'는 스님에게 슬그머니 객관적 물증을 들이댄다. 고지는 애장왕 정묘년에 대장경을 조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애장왕은 경진년(800년)에 왕이 돼 기축년(809년)에 헌덕왕에게 시해됐으므로 원래 정묘년이 없다. 또 스님의 말을 듣고 시험삼아 목판 한두개를 잡아 보고 먼지와 그을음이 손에 묻음을 확인한다. 그의 행동을 멋쩍게 지켜봤을 스님의 모습이 미소와 함께 떠오른다.

장경각 오른편에는 학사대가 있다. 거대한 잣나무가 자라고 있다. 최치원이 꽂았다는 지팡이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나 잣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해인사 경내를 다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 그의 말대로 해인사 경내가 시원하게 보인다. 처마를 맞댄 절집들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듯하다. '폭포가 하얗게 떨어지고 연하(煙霞·안개 낀 풍경)도 사람을 싫어하는' 무구한 홍류동 계곡은 지금 단풍에 잠겨있다. 붉은 단풍과 돌로 뒤덮인 계곡이 절경이다. 군데군데 낙엽이 들러붙은 물은 차고 맑아 눈마저 시리다.

해인사는 이덕무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등장한다. 박지원은 '구외이문(口外異聞)' 편에서 우리나라 천년고찰 해인사의 자주성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는 '이름난 가람이나 큰 절들은 흔히 서로 이름을 답습해 붙이는 수가 많지만 해인사는 그렇지 않다. 중국 순천부(북경의 별칭)에는 옛날 해인사가 있었다. 명나라 때 중건했다 지금은 공장이 됐다. 우리나라 해인사는 천여년 전에 이룩된 고찰인즉 북경 안에 있던 해인사는 응당 신라 때 창건된 절보다 뒤의 일일 것이다'라고 썼다.

울산에서 해인사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빠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대구까지 간다. 서대구를 빠져 나와 화원 인터체인지에서 88고속도로를 탄다. 곧 마산·현풍 방면과 광주·성주 방면으로 길이 나뉘는데 광주·성주방면으로 빠지면 된다. 해인사까지 2시간여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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