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계절을 타는 이들이 많다. 특히 봄과 가을을 접하면서….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 하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한다. 봄빛에 여인네들 마음이 타고 가을 붉은 빛엔 남자들의 마음이 탄단다.

얼마전 산꾼 장성률씨(현대자동차 근무)와 울산 12경에 속하는 산에 대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다가 또 다른 '타는'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무심코 산을 탄다는 말을 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공격적으로 변했는지 안타깝습니다. 산을 사랑하는 선배, 조상님들은 '산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도 아니면 최소한 '산에 오른다'라는 표현과 마음가짐이 맞지 않을까요?"

10월의 주말은 매번 신불산에서 보냈다. 간월재로 이르는 임도를 따라 올라가 보기도 하고 백련암 코스도 택해 보았다. 어느 쪽으로 길을 잡던 빼어난 자태와 아름다움으로 반기는 신불산이 넉넉하게 나를 반겼다. 오르는 길 내내 장성률씨의 말을 기억하면서….

신불산은 태백산맥 줄기의 끝자락을 이루는 능선인 영남 알프스의 7개 산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산(1208m)이다. 모두 1천미터가 넘는 산으로 수많은 멋진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신불산 동쪽면은 경사가 급하고 계곡을 이루는 반면 취서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서쪽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요즘 산행길은 이 코스를 통해 주로 이용하는 등산객들이 많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은빛 물결이 장관인 억새밭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불산과 억새평원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억새평원은 신불산과 취서산까지의 고산지대 넓은 분지가 억새 평원인 것이다.

억새 평원은 앞서 말한대로 신불산과 취서산 사이의 신불평원 60여만평과 간월산 밑 간월재의 10만여평, 고헌산 정상 부근의 20여만평의 억새 군락지가 펼쳐져 있으니 참고삼을만할 것이다. 다만 신불산 억새는 2m 이상 큰 키로 자라는 중북부의 억새와는 달리 어른의 허리 정도가지 자라는 작은 티의 억새로서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억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올해는 억새가 예년만 못하다는 게 다녀 온 사람들의 중평이지만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밭은 한동안이나마 우리들 마음을 풍요롭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간월재에서 신불산 정상으로 오르는 억새밭은 최근 울주군이 힘을 쏟아 나무 데크로 등산길을 조성하는 등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산꾼들에겐 이러한 것들조차 마뜩찮은 일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신불산도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근대사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 한국전쟁 당시 미처 북상하지 못한 인민군 낙오병들이 신불산과 천황산 등지에 아지트를 구축, 4년 가까이 군경과 대치했던 곳이다.

특히 신불산에 거점을 두었던 세칭 동부지구 제4지구당 남도부 부대는 정규군 못지 않은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찾아 볼 수 있는데 파래소 폭포 위 681 고지는 그 중의 하나다. 사방이 확 트인 곳이어서 빨치산 부대 제2 지휘소가 위치했던 곳이다. 지금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배내골 주변의 조망 장소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역사는 흐르지만 아픔은 여전하며 그 상처는 오래도록 우리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스티그마'(낙인)가 될 것이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던져 본다. 황망한 마음 달랠 길 없어 정처없이 흔들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서 손짓하는 사색의 아름다움과 조우하며 그 마음 다독거릴 일이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그 길이 홀로이든 함께이든 느낌은 그때그때 새로울 것이다.

신불산 억새평원이 12경에 포함된 것은 바람처럼 흔들리기 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조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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