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충(徐仁忠). 자는 방보(邦輔). 호는 망조당(望潮堂). 본관은 달성. 고려 판도판서 진(晋)의 후손. 달성군(達城君) 영(潁)의 8세손이자 제처사 구계선생 심(深)의 7세손. 증조부는 주부(主簿) 건손(乾孫), 조는 증 정랑(贈 正郞) 규(規). 아버지는 증 공조참의(贈 工曹參議) 희(熙), 어머니는 숙부인 경산전씨(慶山 全氏)이다.

1554년 9월13일(명종 9년) 울산 동구 동부동 남목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용맹스럽고 정의심이 강했다. 특히 병서에 능하여 주위에서 "장차 나라의 큰 일을 할 재목"이라고 했다. 어린시절 동구 남목동 일대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당시 무술을 연마하던 망조대(望潮臺)가 남아 있다. 1610년 향년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1591년(선조24년) 39세에 갑무과에 급제했다. 8월 경주 불국사 범영루에서 울산, 영천, 홍해, 영덕에서 모인 선비 22명과 국난에 대비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

1592년(선조25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이 70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출항,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다. 절영도에 닻을 내리고, 부산진성의 경계상황을 살핀 뒤 성을 포위했다. 이윽고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싸움에서 부산진성의 수장 정발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졌다.

4월14일 아침,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군수 이언성을 좌위장으로 삼아 군병과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향했다. 동래성에서 부사 송상현과 합류하여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와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선두 부대를 동래성 근처로 이동시켰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왜군이 동래성으로 접근하자 성을 빠져나와 성의 북쪽에 진을 쳤다.

왜군은 동래성 동, 서, 남 등 3개 방향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동래성은 힘없이 무너졌다. 송상현이 순절하고, 양산군수 조영규 등 군민 대부분이 전사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왜군의 포로가 됐다. 이각은 동래 부근의 소산성이 패하자 4월15일 언양으로 도망쳤다가 울산 병영 본진으로 돌아왔다. 병영 본진에는 13개 고을의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전의를 상실한 이각은 성을 빠져나와 밀양으로 도망쳤다가 5월 임진강변에서 도원수 김명원에 붙잡혀 주살됐다. 이렇게 되자 군병은 흩어지고 주민들은 산골로 숨어들어 울산의 병영성과 읍성은 텅 비게 됐다. 이러한 속에 의병장을 중심으로 각처에서 왜적에게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서인충과 서몽호(徐夢虎)가 그들이다. 4월9일 서인충은 경주 문천에서 12고을에서 모인 130여명의 의사와 부윤(府尹), 판관(判官) 등과 더불어 문천회맹을 했다. 5월10일부터 군민과 장정들을 찾아다니며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의병결사대를 조직했다.

9월에 인망이 두터운 전 만호(前萬戶) 김태허가 군수서리에 임명됐다. 이렇게 되자 달포가 못되어 수천의 군사가 조직되고 일사분란한 지휘통제가 가능하게 됐다. 김태허는 언양헌감 박홍춘을 서면장, 전 훈련봉사 전웅춘을 남면장으로 삼아 양산, 기장 쪽의 적을 막도록 했다. 서인충은 주사장으로 명하여 공사선을 수리, 수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10월 들어 적병이 6척의 배를 타고 기장과 아리포 등에서 울산을 향해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쳐 적군 30급을 베고, 적선 2척을 침몰시켰다.

서인충은 이후 부산, 동래, 기장, 서생, 개운포, 태화강 하구 울산만, 경주 봉길리, 이견대, 장기 등 동해안 일대에서 왜군과 싸웠다.

경남 창녕 화왕산성에서 곽재우 의병장이 가등청정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전응춘, 이경연 등 5인과 함께 달려가 구출했다. 또한 대구 팔공산 전투에도 참가했다.

1592년 2월3일 경주 봉길리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적의 배 50여척과 싸워 크게 이겼다. 7월22일 적선 수백척이 쳐들어 오자 여러 장수를 해안의 각 진영에 나누어 배치하고 친히 주사장으로 나서 크게 이겼다. 5월과 7월 사이에 공선과 사선을 수리 3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싸움울 주도해 외군 67급을 사살했다.

서인충은 임란동안 1천명이 넘는 적들을 사살했다. 수많은 적선을 함락시키고, 무기를 포획했다.

11월25일 경상우감사 김성일, 도원수 권율, 좌병사 박진, 어사 한준겸이 장계를 올려 서인충의 공을 선조임금에게 보고했다. 선조는 서인충의 공을 높이 인정해 교지를 내렸다. 1593년(선조26년) 10월15일 훈련원정(訓練院正), 1594년 10월15일 부산 다대포 수군점절제사, 1596년 3월7일 부산진 수군점절세사에 임명됐다.

1597년 1월15일 왜적은 서생포에서 강화를 요청하고, 7월 울산 학성에 주둔하면서 부성(府城)을 헐어다 성내에 왜성을 쌓았다. 12월 당나라 장수 양호경리와 마귀제독이 3만여명의 기병과 우리 군사 2만명을 이끌고 성을 공격해 왜군을 섬멸했다.

1598년 12월12일 서인충은 부산진 점사에 재임명 됐다.

서인충과 울산 의병들의 활약은 조정에도 알려졌다. 1598년(선조31년) 12월 좌의정 이덕형이 이러한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 당시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격상시켰다.

1599년(선조32년) 12월27일 서인충은 경주에서 열린 특별 포상잔치에 참석, 울산출신 165명과 함께 임금으로부터 은전을 하사받았다. 임금의 선유문(宣諭文)에 '울산장사들이 아니었다면 나라의 남군(南郡)을 잃은지 오래였을 것이다'고 적혀 있다.

1600년(선조33년) 서인충은 울산의 전응충, 박홍업 등 10명과 함께 선무원종 1등 공신에 서록됐다. 1610년 6월10일 출생지 남목에서 57세로 서거, 동구 동부동 남목산에 묻혔다. 1783년(정조8년)에 증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청에 증직되고, 망조당이란 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15년) 서인충의 5세손 서달급(徐達伋)이 중구 다운동에 다산사(茶山祠)를 세워 봉향하다가 소실됐다. 그후 동구 동부동 옥강정사(玉崗精舍)에서 봉향했으나 이곳 역시 길이 생기면서 철거됐다.

임진왜란 때 서인충이 분전한 전공은 <군공청일기>, <조선왕조실록>, <울산읍지> 등에 수록돼 있다. 1844년 서씨문중에서 <망조당유사>(다산사 간)를 펴냈으며, 이를 번역한 <망조당 서인충장군 유사>(김송태 번역, 서진길 편저)가 임진왜란 400주년이 되는 1992년 4월15일에 간행됐다.

현재 월성서씨 문중에서 다산사복원추진위를 구성, 중구 다운동에다 옛날의 다산사 복원을 추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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