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생의 길 제시한 민족의 위대한 스승

최현배(崔鉉培). 우리말 연구와 한글 지킴이로서 평생을 살다간 겨레의 큰 스승이자 선각자. 호는 외솔. 본관 경주. 1894년 10월19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울산시 중구 동동) 613번지에서 아버지 최병수, 어머니 박순화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병영 3·1운동을 주도했던 동생 현구가 있다.

어린시절 몸이 허약했으나 총명하고 명석했다. 1899년 여섯 살 되던 해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열네 살 때까지 서당 공부를 계속했다. 1904년 14살 되던 해에 병영에 사립학교인 일신학교(지금의 병영초등)가 신설됐다. 최현배는 이 학교에 입학해 3년 과정의 신식교육을 받았다. '양숫자(아라비아숫자)와 체조, 산술을 배웠다. 특히 산술공부를 통해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을 세웠고, 일생의 학문연구의 근본을 닦았다'(<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나라사랑 10집')

1910년 4월1일 최현배는 외사촌 박필주와 고향 선배 김두봉의 권유로 관립 한성고등학교(지금의 경기고)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이 해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한국 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도'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조선은 왕조가 건국된지 27대 519년만에 망하게 된 것이다. 최현배는 '국권 상실'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라 잃은 통분함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을 위한 공부보다 우선적인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두봉과 함께 주시경 선생이 보성중학교에서 열던 일요강습소 조선어강습원에 나가면서 향후 진로의 지향점을 새롭게 다졌다.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 말 우리 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 정신에 깊은 지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이 됐다.'<나의 걸어 온 학문의 길> 사상계 6월호, 1955

1913년 3월2일 조선어강습 고등과를 1회로 졸업했다. 이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최현배는 경성고보 4년을 휴학하고 울산으로 내려가 1년간 상복을 입었다. 1914년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경남 동래 동명학교에서 조선어 강습회를 맡아 가르쳤다.

7월에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셨다. 최현배에게 있어 스승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사제의 연을 맺은지 4년에 불과했으나 주선생에게서 받은 영향은 '평생 스승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 학문과 교육으로 한글과 나라, 겨레사랑을 실천했을' 만큼 절대적이었다. 1915년 경성고보를 졸업,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했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일본어 및 한문과에 입학했다. 3학년 때 교육학을 전공했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셨다. 3월 히로시마 고등사범을 졸업했다. 졸업 후 공립학교에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했으나 병을 핑계로 울산으로 돌아와 휴양했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에 교원으로 들어가 2년간 근무했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고, 졸업논문으로 '페스탈로찌 교육학설'을 발표했다. 1926년 '조선민족 갱생의 도'란 글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연재했다. 일본 나라 외국어학교를 사직하고 귀국해 연희전문 교수가 됐다. 1929년 <우리말본 소리갈>(연희전문 풀판부)을 펴냈다.

최현배는 당시 "국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글연구와 교육을 통해 사회와 민족을 개조하고, 민족적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1929년)으로 활동했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검거돼 3개월간 투옥됐다. 연희전문 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최현배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구에 매달려 1940년 <한글갈(정음학)>을 펴냈다. '훈민정음에 관한 일체의 역사적 문제와 한글에 관한 일체의 이론적 문제를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논구'한 명저로 "우리의 지적 소산 중 가장 위대한 한글에 대한 연구사와 공시적 문자 음운론과 통시적 음운사의 영원한 학문의 대작'(김석득, 한글학자)이었다. 1941년 최현배는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됐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해, 검거, 투옥한 사건이다. 최현배는 이 사건에 연류돼 이윤재, 이극로, 이희승, 장지연 등과 함께 함흥경찰서에 검거됐다.

1945년 8월13일 일본 고등법원은 최현배에게 4년 형량을 확정했다. "조선어학회는 학술문화단체를 빙자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단체"이며,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등은 중대 악질로 한반도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판결했다. 최현배는 8·15 광복 때까지 3년 여를 감옥에 있었다. 옥중 생활 속에서도 한글 가로글씨 쓰기 연구를 계속했다. 1947년 <글씨의 혁명>을 펴냈다.

1945년 9월 최현배는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에 부임해 1948년 9월까지 재직했다. 국민교과서 편찬업무에 종사하면서 <한글 첫걸음>, <중등교육독본>(상, 하)을 펴냈다. 1949년 7월 한글전용촉진회를 창립, 위원장이 됐다.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한글의 투쟁>,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등을 펴냈다.

1949년 5월 5월30일 최현배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주군 을구에 출마, 낙선했다. 1951년 1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으로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아 1954년 1월까지 교과서 편찬작업을 주도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 말 말 수 사용의 잦기 조사(1955년)', '우리 말에 쓰인 글자의 잣기 조사(1956년)' 등을 펴내고, 교육 체계를 세우기 위해 교과서와 사전 편찬에도 착수했다.

1957년 최현배는 한글학자로서 필생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조선말 큰 사전>을 완성했다. 한글학회와 한글학자들과 평생을 함께 하면서 일궈낸 쾌거였다. 또 1958년 <나라사랑의 길>, 1963년<한글 가로쓰기 독본>을 펴내 조국에 대한 끝 없는 사랑과 겨레에 대한 자신의 교육과 사상을 완성했다. 1967년 4월5일 울산 병영의 '삼일충혼비'문을 쓰고, '삼일사'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 1970년 3월23일 새벽 외솔 최현배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운명했다. 향년 77세.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경기도 양주군 진집면 장현리에 안장됐다. 부인 이장련 여사도 남편이 작고한지 18일만에 세상을 떠나 곁에 함께 묻혔다. 정부에서는 영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1971년 5월 15일 장충단 공원에 외솔을 기리는 흉상이 세워졌다. 1989년 울산시 남구 남부도서관에 기념표석, 1990년 6월 같은 장소에 흉상이 세워졌다. 또한 모교인 중구 병영초등학교에도 흉상이 세워졌다.

현재 울산시, 중구청, 외솔 최현배선생기념사업추지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2006년 2월 완공예정으로 외솔 최현배 생가터(시지정기념물 39호) 및 기념관 복원을 추진중에 있다.

신춘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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