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기반 닦은 한국민속학의 출발점

송석하(宋錫夏). 민속학자. 호는 석남(石南). 은진 송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 출신. 1904년 10월1일 고종의 시종부경(侍從副卿)을 지낸 부친 송태관과 모친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독선생을 두고 한학을 공부했다. 1912년(9세) 신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언양공립 보통학교(지금의 언양초등)에 입학했다.

부친이 울주군 하상면 반구동(지금의 중구 반구동)으로 이사하면서 1913년 4월6일 울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울산초동)로 전학, 2학년에 편입했다. 1916년(13세)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생활기록부를 보면 농업과 산술 등 전과목이 뛰어났다.

1917년(14세) 송석하는 부산공립상업학교(지금의 부산상고)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이름은 송석봉(宋錫鳳)이었다. 부산공립보통학교는 일제 치하에서도 항일운동의 본산 역할을 하던 곳으로 송석하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 일본 동경상과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과 집안문제 등으로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했다.

1923년 일본에서 귀국한 송석하는 민속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상황은 <민속탐방 잡기>(1935년)에 잘 나타나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사선을 넘고, 그해 12월까지 버티었다. 후쿠다 도쿠조 박사의 지도 하에 이재민 상활상태 조사를 이유로, (집에서는) 장가 가라는 성화가 극에 달해 세토나 아카이의 한 섬에 피신해 있었고, 그 섬의 성기숭배 사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송석하는 민속극이 행해지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현장을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독일산 카메라로 현장을 생생하게 촬영했다. 민속극 외에도 민속분야의 것이면 '행위민속으로서의 전승오락과 가면무, 연극, 언어 민속으로서의 문헌설화, 물질문화로서의 가면 등 민속학의 전분야를 망라'해 학문적 대상으로 삼았다. 고서수집, 서지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중요한 민속자료가 있으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집했다.

송석하는 그러나 책상머리 연구보다 민속학의 보전과 보급 등 문화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25년 송석하는 김경옥 여사와 결혼, 192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 22번지로 이사했다. 이듬해 장남 대영씨가 태어났다.

1929년 민속연구에 대한 최초의 글 '조선의 인형거지'를 <민속예술>(제2권 제4호)에 발표했다. 이후 전국 각지의 민속자료를 조사, 수집하고, 그 결과를 잡지나 신문에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민속학을 위한 민속학적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했다.

사학자 이병도는 송석하의 학문적 좌표를 정확하게 간파, "실로 송석하는 한국 민속학계의 개척자요, 최초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장철수 교수(한국정신문화원)는 송석하를 '한국 민속학의 출발점'이라고 표현했다.

송석하는 이렇듯 민속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정의하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송석하의 업적은 크게 학문연구와 사회활동으로 요약된다.

학문연구는 사후 14년 뒤에 나온 <한국민속고>에 담겨 있다. 사회활동은 민속학의 실천이라는 맥락과 닿아 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업적 중 하나가 1932년 한국 최초의 민속학회인 <조선민속학회>를 정인섭, 손진태 등과 발기하여 출범시킨 일이다. 송석하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 사무실을 열고 사비를 털어 기관지 <조선민속>을 발행했다. 1933년에는 <진단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위원장과 재무위원을 겸했다. 1945년 9월 조선산악회를 창립, 회장을 맡아 지식인들의 학술답사 연구활동을 견인했다. 11월8일 한국 최초의 민속학 관련 박물관인 국립민족박물관을 창립, 관장으로 취임해 다음해 4월25일 박물관을 공식 개관했다. 민족박물관은 6·25를 겪으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모태로 출발한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됐다.

송석하는 1929년 <민족예술>에 개재된 첫 논거 '조선의 인형거지'를 시작으로 1947년 경향신문에 실린 '흑산도의 전설과 해신의 성(性)'에 이르기까지 86편의 글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송석하가 이렇듯 민속탐사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송석하는 국립 서울대에 인류학과를 개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경성대학 법학부)의 교수진은 일제 치하의 국학을 연구하던 진단학회 구성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송석하는 불행하게도 서울대에 인류학과를 만들고도 정식 교수직 발령을 받지 못하였다.

1948년 8월5일 송석하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서울 계동 자택에서 4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정부 수립을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 8월9일 국립민족 박물관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겼다가 1996년 충남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서풍농장 중앙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했다.

10월 송석하의 유고가 '민속예술문제'가 <민주경찰>(2-5호), 1956년 5월 '허수아비고'가 <민속학보>(창간호)에 실렸다. 1959년 9월 누이 동생 여혜와 그녀의 남편인 민속학자 양재현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발표했던 11편의 글과 조광지에 실렸던 11편의 글들을 정리해 유고모음집 <한국민속고>를 펴냈다.

송석하는 성격상 학문연구는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학문의 기반을 닦아서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다져 놓았다. '학회 창립과 기간지 발간 등을 통해 인접 학문과의 차별성을 획득했다. 종래의 문헌 연구에만 치중하여 역사학의 보조 과학적 입장을 취하던 민속학 연구 수준을 독립 과학으로서의 민속학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민속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민속극과 민속오락 연구에서도 선구자적 업적을 넘겼다.' (조유전, 1997, 1월의 문화인물)

송석하의 연구활동은 '문화민족주의'라는 당시의 지성사적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송석하는 학문활동에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그것은 민속학에서 인류학까지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송석하는 생전에 민속자료의 수집과 정리 외에 이러한 자료를 대중에게 보급하고 외국에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의 민속을 보다 많이 알리려고 노력했다.

송석하의 민 속관련 글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공연민속(민속극)이었다. 반드시 현지 조사를 통해 접근하는 민속극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동래야유, 강렬탈춤, 봉산탈춤, 양주별산대 등 실로 다양했다.

1975년 국립민속박물관은 송석하의 유품 중 민속학 관련 사진을 정리해 <민속사진특별전도록>을 발간했다. 1996년 4월25일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1월의 문화인물'(문화체육부 지정)로 선정됐다. 이 해 국립민속박물관은 송석하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기념자료 전시회를 열었다.

2004년 11월22일 송석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송석하 전집(2권)과 함께 영상(사진)자료집(석남 영상의 세계-연희편)이 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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