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장수의 지조 난세에 더욱 빛나

절개가 도도한 선비와, 충의(忠義)있는 장수(將帥)의 변절하지 않는 지조 앞에는 사나운 세월의 물결도 저만치 물러선다. 조운은 상산(常山)사람이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조운의 지조와 의리에 관한 미덕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왔다.

예나 이제나 지조를 지키는 것은 양심 있는 지식인의 덕목이기에 지조 있는 지도자를 따르고 존경하는 것이다. 지조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라 했다.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와, 교양인 또는 지도자의 생명이다. 지조를 저버리기를 밥 먹듯이 하는 오늘의 정치가나 일부 학자들이 볼 때 지조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시대에 걸맞지 않는 일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 옛날에도 난세(亂世)에는 뜻있는 학자들이 나아가 벼슬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굶주려도 고깃국에 가난을 팔지는 않았다, 지조는 역시 매운 여인의 정조와도 같고 절개와도 같은 것이다. 일찍이 어떤 선비도 권력에 영합해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둘러쓰지 않고 나오는 사람을 우리는 보지 못하였다.

삼국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 하나인 장판파 싸움을 극명하게 드러낸 호북성 당양시를 찾았을 때, 대륙은 차가운 겨울의 한가운데 있었는데도 조운의 충의에 찬 기개는 뜨겁게 느껴져 나의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자룡(조운의 자)의 우뚝 선 조각상 앞에 나는 잠시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많은 세월을 건너와서도 당시의 장판파는 그대로 흙 언덕이 몇 리나 뻗혀져 있었고 자룡의 영웅 됨과 충의에 찬 기개에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었다. 조각상의 높이는 10m나 되고 말이 뛰어오르는 모습에 단기필마로 조조 군에 대항했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장판웅풍(長板雄風)이라 새긴 비석이 같이 세워져 있었다.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밀고 들어 왔을 때 유비는 10여만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향하게 되는 데 그때 장비에게는 후방을 맡기고 조운에게는 가족을 부탁했다. 당양에 이르렀을 때 조조 군에게 추격을 받아 저항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이 혼란에 빠졌다. 유비는 가족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하고 조운은 되돌아가 유선을 찾아다니다 조조의 부하 하후은을 죽이고 조조의 자랑인 청홍보검을 빼앗는다. 높은 곳에서 전장을 지휘하던 조조는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정말 대단한 장수로구나 저자를 꼭 생포해야겠다. 저 자에게 활을 쏘지 말고 기어이 사로잡으라고 했다.

혼란의 와중에서 유비의 가족과 떨어진 조운의 주변에는 창 한 자루와 말 한필 밖에 없었다.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유선을 찾아 헤매었다. 토담 뒤에 우물 옆에서 미부인과 유선을 발견하고 더구나 미부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조운은 이 엄중한 포위망에서 끝까지 구하겠다고 했지만 짐이 될 뿐이라며 미부인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조운은 미부인이 목숨을 던져 자결하는 것을 보고 조조의 군사에게 욕보이는 일이 없도록 토담을 무너뜨려 우물을 덮었다. 그리고 즉시 가슴에 유선을 품고 달렸다.

적진을 뚫고서 유선을 유비의 품에 넘겼을 때 유선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자, 유비는 그런 아들을 땅바닥에 내 팽개치며 "이까짓 자식 놈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 하였구나." "아닙니다. 제가 무사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자께서 천은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룡의 충의와 지조의 향기는 세월이 갈수록 더해져 그 매운 향기를 역사는 결코 잊지 않는다.

글 한분옥 수필가 그림 박종민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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