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저만치 오고 있는 것만 같다. 한낮의 햇살이 제법 따사롭다. 마냥 움츠리고만 있을 날씨는 아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나절 걸을 만한 산길나들이코스로 경주 단석산을 택했다. 유년 시절 눈밭을 헤치며 아버지 손을 잡고 다녀왔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고 내 아이를 데리고 다시 그 길을 따라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색다른 설렘이다.

경주시 건천읍 우중골. 가구수는 변하지 않은 듯했지만 기억 속의 동네는 아니다. 20여년 전만 해도 초가와 양철 지붕 뿐이었는데. 허름한 양옥으로 바뀌었다.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치던 골목길과 허허벌판이던 눈밭을 지나야 사람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산길이 나타났었다. 그런데 동네에서 단석산 8부 능선에 자리한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199호)까지 2km가 4륜구동 자가용을 이용하면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올라 갈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절반은 1곘트럭도 오를 수 있는 포장길이다.

힘 센 장군이 큰 돌을 내리쳐서 쪼개놓았고, 부처님이 바위에 내려와 그대로 새겨졌다는 등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에 한껏 도취됐던 8살, 6살 남매가 먼저 앞장선다. 1km 남짓 잘 정비된 임도가 계속되는데 길 옆으로 얼어붙은 계곡이 나란히 이어진다. 군데군데 작은 폭포수가 하얗게 얼음 기둥을 만들고 있다. 20여분 오르면 '신선사 800m'라 적힌 나무기둥이 길가에 꽂혀 있다. 이 곳부터는 넓은 임도와 비좁은 등산로로 길이 갈리는데 신선사 마애불상군까지 어느 쪽으로 오르던 20~30여분 더 걸린다.

신선사도 많이 변했다. 3칸 짜리 오두막 안에 주지스님의 살림집과 부엌, 불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새 건물을 지어 불상을 따로 모셔 놓았다. 스님 거처도 간이 건물로 별도로 지어 놓았다. 스님은 출타 중이다. 절간 옆 절벽에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하지만 없던 울타리가 둘러 쳐졌고 지붕에는 투명 아크릴판이 덮였다. 아찔한 난간을 조심스레 지나쳐야 바위에 새겨진 불상군을 볼 수 있던 예전에 비하면 안전하게 주변이 정리됐다. 하지만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바위 표면의 불상들은 기억에 비해 많이 어두워진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3층 건물 높이의 바위 불상을 처음 본 터라 눈을 굴리며 신기해한다.

아이는 세로로 길게 갈라진 마애불상군 바위를 보고 차 안에서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누군가 칼로 내리친 것이라 오해를 한다. "옛날에는 사람도 크고 칼도 컸나?"라고 묻는다. "신라 장군이 쪼개었다는 바위는 단석산 정상에 있는데 조금 더 산길을 올라가야 있다"고 했더니 꽁무니를 슬슬 뺀다. 건천읍에 사는 한 등산객이 정상까지는 3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어른도 숨이 깔딱 넘어가는 오르막이라고 알려주었다. 정상까지 오르기를 포기했다. 불상 앞에 주지 스님께 드리려 가져갔던 커피와 사탕 등을 놔두고 산을 내려왔다.

하산길은 마애불상군에서 이어지는 좁은 산길을 선택했다. 넓고 편리했던 임도와 달리 바짝 마른 활엽수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는 비좁은 산길이다. 도중에 갈래갈래 나뉘기도 하지만 길이 가장 뚜렷하고 각종 산악회 리본이 많이 붙어있는 길을 택하면 15분 여만에 오막살이 집 한 채를 만난다. 그 곳에서부터는 임도가 나타나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10여분만 더 내려가면 '신선사 800m' 나무기둥을 다시 만난다.

앞서 걷는 아이와 아이 아버지를 뒤에서 지켜보니 슬며시 옛 생각이 난다. 올 겨울 유난히 가문 탓에 온 산이 메말라 있지만 한 번 눈이 내리면 한 겨울 내내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던 그 곳. 그 눈길을 함께 걸었던 친정 아버지는 도무지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오로지 발끝만 보고 걸었다. 아버지 따라잡으려 헉헉거리는 숨소리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철이 없는 단화를 신었던 탓에 눈길에 한 걸음이 멀다하고 무릎이나 엉덩이를 찧을라치면 아버지는 말없이 당신의 양말을 벗어 내 신발 앞코에 묶어 주셨다.

요즘 아버지는 그 정도가 아니다. 자식 사랑의 경중을 떠나 아이의 질문에 리플을 달 듯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아이 아버지를 보니 우습기까지 하다.

"옛날 어느 장군이 칼을 들고 바위를 탁 치니까 쩍 하고 반으로 쪼개졌데"

"누가? 이순신 장군이?"

"아니. 김유신 장군이라고… 신라시대에 말이야…"

"근데 말이야. 이순신하고 김유신하고 누가 더 힘이 세?"

여섯살배기 아이에게 전설이나 역사를 알아듣기 쉽게 들려줄 말을 못 찾았는지 아버진 "아무튼 있어"라고 뭉뚱거리면서 자른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대화는 갈지(之)자 산길을 걷듯 일관성도 없고 주제도 잡기 힘들다. 하지만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모퉁이처럼 대화는 길고도 끝이 없다.

"아까 거기 두고 온 초코렛하고 사탕...진짜로 부처님이 와서 먹나?"

"먹지"

"부처님이 진짜로 살아 있나?"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옛날에 돌아가셨지만…"

"그라믄? 부처님이 시체란 말이가?"

아버진 또 말이 막힌다.

####이렇게 찾아가세요####

경주 시외버스터미널 옆 교량을 건너자마자 바로 좌회전 한다. 4번 국도를 따라 건천읍 내로 진입한 뒤 건천농협을 끼고 다시 좌회전한다. 철도, 고속도로, 고속전철 터널 등 굴다리를 차례로 지나치면 큰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를 다 지나갈 무렵 '신선사 마애불상군' 표지판이 나타나고 100m 가량 후방에 비좁은 진입로가 나온다. 산내행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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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답사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 지 몰라도 자칫 재미없고 따분한 일정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 겨울철, 아이들이 가장 신나게 뛰놀 수 있는 놀이터로는 단연 눈썰매장이 최고. 단석산에서 자동차로 20~30분 거리에 두 곳의 눈썰매장이 있다. 울산으로 바로 돌아와야 한다면 운문호를 끼고 돌아오는 드라이브 길을 추천한다.
 ▲경주월드 눈썰매장=경주 보문단지 내 경주월드에 130m의 성인용과 어린이용 눈썰매장, 250m의 스키썰매장이 있다. 6천~8천원의 입장료를 내고 놀이 공원에 들어간 뒤 썰매장 이용요금을 따로 지불한다. 눈썰매장은 8천~9천원, 스키썰매장은 1만2천~1만3천원이다. 054·745·7711.
 ▲산내 OK그린=각종 겨울 놀이 체험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다. 눈썰매장(5천~7천원), 논에 물을 뿌려 얼려놓은 얼음 썰매장(2천원)이 특히 인기다. 동력으로 움직이는 스노모빌(가족당 1만원)도 추천할 만하다. 단체(30명 이상)는 눈썰매와 얼음썰매, 미니 열차, 점심 식사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9천원)이 이롭다. 054·751·8118.
 ▲운문댐=우중골에서 경주방향으로 가지 말고 청도 및 운문 방향(20번 국도)과 언양 방향(24번 국도)으로 돌아오면 운문댐을 한바퀴 둘러 볼 수 있다. 벤취와 팔각정 등이 있어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많다.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져 수몰 전 마을의 교량과 돌담길이 드러나 있다.

###맛있는 식당도 있어요###

▲단석산장=단석산 등산로 입구 우중골 마을에서 숙박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식당이다. 오래 된 듯 낡고 아담한 단층건물이지만 주말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 백숙(2만7천원)이 주메뉴다. 산행길에 들러 예약해 놓으면 2시간여 뒤 하산길에 바로 먹을 수 있다. 두부김치(5천원)와 찹쌀 동동주(6천원)도 있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간단하게 한끼 식사를 해결하려면 나물비빔밥(4천원)을 내 주기도 한다. 054·751·1834.

글·사진=홍영진 주부리포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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