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서 절개를 고집한 이상주의자

우물의 물도 자꾸 처야 샘이 난다. 병서에 소개된 계책들도 자꾸 써 봐야 지혜가 마르지 않는다. 수원이 마르면 흐를 물이 없듯이 병법(兵法)의 묘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생명이 있으면 호흡이 있기 마련. 그러나 생명이 없는 병법에서는 기운은 꼭 사람의 호흡과도 같아서 순리에 어긋나면 오직 거칠 뿐이다. 피는 꽃, 지는 잎 자연의 어느 것 하나 순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전쟁은 순리가 아닌 역리(易理)다.

평화스러움은 자연스러운 호흡이지만 전장의 기운은 황무(荒蕪)한 호흡이다. 까닭에 먼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순욱 그는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난데다 어지간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적절한 계책을 찾아내어 처리함이 과히 덕장이다. 변절이란 절개를 바꾸는 것.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숙한 부인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없다 했다. 사람은 그 늘그막을 보라했다.

수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참모나 보좌가 훌륭하지 못하면 대업을 달성하기 어렵다. 순욱이 조조의 패업을 이루기 위해 해낸 역할은 장량과 숙하 두 사람이 해낸 일을 합친 것과 같다. 조조는 중대한 사항을 결정 할 때는 순욱과 상의했다. 사마의를 중용한 이도 순욱이고 정욱, 곽가, 순유 등을 이끌어 최고의 참모진을 구성하고 불협화음 없이 조조를 보좌한 이도 순욱이다. 조조는 이윽고 순욱을 제후로 봉하고 자기의 딸을 순욱의 장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하여 조조와 순욱은 깊은 신뢰 관계를 맺게 된다. 스물 아홉 살에 조조를 찾아간 이후 21년 동안 순욱은 조조가 한나라 황실의 충직한 신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여포와 조조의 싸움에서 여포군사를 격퇴한 것은 조조군의 장수들이지만 실제 1등 공신은 순욱이다. 순욱은 천자를 옹립하여 허창에 천도할 것을 강력 권유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천자봉대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조는 무슨 일을 하든 명분을 얻게 되었으니 조조군단으로서는 대단한 수확이다. 라이벌 원소를 토벌함도 모두가 순욱의 계책이다. 원소가 북방의 강자 공손찬을 제압하고 하북 전체를 손아귀에 넣자 초조해지는 것은 조조였다. 그런 조조의 두려움을 간파한 순욱은 조조가 도량, 책략, 무력, 덕의 4가지 면에서 우월하다고 말하면서 원소토벌을 단행하도록 한 것이다. 관도대전의 원전초전인 백마전투에서 순욱은 원소 군을 유인하여 본대를 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객장 관우로 하여금 안량과 문추를 참살케 한다. 하여서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마치 앞을 내다보듯 하는 이런 순욱을 두고 조조는 "나의 장자방이구나"했다.

실제 순욱은 장자방 보다는 소하에 가까운 인물이다. 즉 관도대전에서 이긴 조조가 의기양양해서 하북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천하쟁패의 꿈을 가졌던 것을 순욱은 패도 후 왕도를 내세웠던 것이다. 야심가 조조는 그게 아니었다. 순욱이 빈 합을 받은 이유는 왕만이 받을 수 있는 아홉 가지 예우를 거절하라고 조조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이미 새 왕조를 꿈꾸기 시작한 조조는 겸양하여 물러서 맑은 절개를 지키라는 순욱의 진언을 물리쳤고 순욱은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도다"라고 한탄한다.

어느 날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보내와 뚜껑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음식 없는 빈 합을 보낸 조조의 뜻을 읽고 자살한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이 있고,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친다고, 조조는 빈 밥그릇 하나로 순욱을 제거한 것이다.

삼국지에서 가장 깨끗한 고절(苦節)을 실천한 이상적인 인물, 그리하여 현실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 순욱 그의 마지막 하늘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그 한량없는 청정한 아름다움에 오늘도 나는 그를 꿈꾼다.

글 한분옥 수필가 그림 박종민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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