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가'와 '어부사시사' 등을 남기면서 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고산 윤선도는 조선시대 그 어느 때보다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살았다. 더욱이 그는 정권에서 도태된 남인이어서 말년에 전라도 보길도에 안착할 때까지 귀양과 귀향을 반복했다. 부산 기장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출발지였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이 바뀔 때까지 6년간 그는 기장의 한적한 어촌인 두호마을에서 첫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가 기장 두호마을에서 유배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당시 그는 젊었고, 보길도에서 쓴 '어부사시사' 같은 절창을 남기지도 않았다. 두호마을에서의 시간은 전도유망한 현실 정치가가 고뇌와 울분을 해풍에 삭였던 세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붕당의 정쟁과 전횡, 피비린내 나는 살육에 따른 국가의 위기는 혈기왕성한 그에게 큰 근심이었다. 그의 유허지인 황학대(黃鶴臺) 팻말에는 그가 이곳에서 충효에 관한 시 6편을 지었다고 적혀있다.
부산으로 가는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경이롭다. 자연은 종종 도시가 포기한 감성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가 경이로움 같은 것으로 돌려준다. 해수면 위에서 점점이 몸을 뒤집는 햇빛과 막막한 수평선 위에서 도드라지는 어선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형형색색의 집들이 단조로운 바다 풍경에 강세를 준다. 강세를 따라 풍경은, 놀랍게도, 꿈틀거린다. 살아 움직인다.
꿈틀거림은 두호마을까지 이어진 해안도로(3.5㎞)가 시작되는 대변항부터 피부로 느껴진다. 부두에 정박중인 수십척의 멸치잡이 어선은 간밤의 노동으로 피곤한 선체를 뒤척인다. 대신 한낮은 부두를 따라 좌판을 펼쳐놓고 건어물과 해산물을 파는 상인들 차지다. 목청 높여 호객하고, 흥정하고, 손님이 그냥 지나치면 아쉬워하는 모습들은 생생(生生)하다. 멸치잡이 어선들의 유인등이 꺼진 곳에서 그들은 그렇게 빛을 내고 있다.
두호마을은 월전을 지나 해안도로가 끝나는 곳에 있다. 해안가로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 위에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황학대가 보인다. 그 위에서 바라보이는 기암괴석이 시퍼런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멀리 바위 위에 모여 있는 낚시꾼들이 바다생물인 듯 꿈틀거린다.
윤선도의 유고집인 '국역 고산유고'(소명출판 펴냄, 2004)에는 이곳에서 지은 시라고 명확히 밝힌 시가 2편 있다. '戱贈路傍人(길가 사람에게 장난삼아 지어주다)'와 '詠一日花(일일화를 읊다)'가 그것이다. 지은 시기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연대상 두호마을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病中遣懷(병중에 느낌이 있어)'는 유배지에서 그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궁벽한 땅의 유배살이가 어찌 나의 즐거움이랴만/ 나라사랑, 선조 생각에 매양 스스로 근심하네/ 산 넘어 옮겨가는 고달픔일랑 괴이히(이상히) 여기지 마소/ 서울을 바라보매 오히려 막힘이 없음을 깨닫네'
윤선도는 기장에 유배된지 얼마 안돼 양아버지 관찰공 유기(惟幾)의 상을 당한다. 그는 3년 간 상복을 입고 멀리서 양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한다. 정치적 시련과 함께 찾아온 인간적인 아픔은 향후 그의 문학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 그는 50세(1636년) 때 유배지 영덕에서 둘째 아들 의미(義美)의 죽음을 접한다. 3년 뒤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중에는 막둥이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
'아! 날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이 흩어진데 흥청거리며 걸어가서/ 쩌거덩 쩌거덩 어여차/ 눈과 달이 서산에 넘도록 송창(松窓)을 기대어 있자'
그가 보길도 부용동에 살면서 지은 '어부사시사'의 겨울 시편은 자연에 대한 흥겨움이 넘친다. 그러나 이 흥겨움의 맨 밑바닥에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겨울, 기장 두호마을은 한 젊은 유배객의 서러움과 슬픔 한줌 쥐고 돌아오기에 적당한 곳이다.
# 고산 윤선도
선조 20년(1587년) 한양 동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 17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으로 당시 실력자 이이첨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30세 때 함경도 경원과 부산 기장으로 귀양을 갔다.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도사로 임명됐으나 사직하고 전라도 해남에 은둔했다.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42세 때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대부로 정계에 진출, 공조좌랑, 호조정랑,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올곧은 성품으로 자기 주장을 펴다 자주 귀양을 떠났다. 말년에 해남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 등에서 은거하다 현종 12년(1671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 대변항과 해안도로
한국관광공사가 1월의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한 곳이다. 부산시 기장군 대변항은 일출과 영화 '친구'의 촬영지인 방파제로 유명하다. 또 대변항부터 두호마을까지 이어진 해안도로(3.5㎞)는 바다와 맞닿아 있어 여유롭게 겨울바다를 즐길 수 있다. 해안 곳곳에 펼쳐진 기암괴석과 등대가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산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했던 두호마을 황학대는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도로 옆 식당과 횟집, 포장마차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해동 용궁사와 송정해수욕장, 달맞이 공원 등 인근에 둘러볼 곳도 많다. 051·888·3501(부산시 관광진흥과)
글·사진=서대현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