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 50리길 승용차 10분거리를 9시간 소걸음
성난 황소 콧김같은 꽃샘추위에 몸가누기 힘들어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지 어언 반년이 넘었다.

이번 산행은 추풍령을 지나 작점고개까지 오십 여리 길이다. 추풍령(210m)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출발한 종주 길은 이제 겨우 210여 km왔으니 아직 남은 거리가 일천이삼백리길, 멀고 먼 길이다.

길이란 본래 도(道)와 로(路)라는 의미가 있지만 머물고 떠남을 전제로 전자가 깨달음의 길이라면 후자는 몸으로 가야하는 길이 된다.

옛날엔 먼 길을 떠날 때 우선 짚신부터 챙겨야 했다. 그리고 그 짚신(履)을 신고 걸어간 흔적(歷)을 이력(履歷)이라 했으며 살아가기가 고달팠던 백성들의 삶이란 그저 신발이 끌고 간 길이 삶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짚신이라는 것이 잘해야 한나절 걸음이고, 이 삼 십리도 못가 터지는 바람에 나그네는 저녁마다 짚신을 새로 삼아야 했으니 '이력이 났다' 함은 고달픈 삶에서도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예로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이용했던 길은 영남대로(嶺南大路)였다. 그 첫째는 낙동강 좌도(左道)로 울산 경주 풍기 죽령을 경유하는 열닷새길이요. 낙동강을 타고 넘는 중도(中道)는 부산 밀양 대구 상주 조령 음성 광주길이다. 상주(尙州)의 옛 이름 낙양(洛陽) 동쪽에 있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洛東江)' 나루를 이용하기도 한 중도 길은 열나흘 길이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김해 현풍 추풍령 영동 청주 죽산 양재로 이어지는 열엿새 길이 우도(右道)였다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誌)에 기록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죽령은 근처 안동일대 사람들조차 '주욱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기피했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피했으니 자연스럽게 경사스런(慶) 소식을 들을(聞) 수 있는 문경(聞慶)새재를 즐겨 넘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흘대(忽待)를 받아오던 추풍령이 1900년대 초 철도가 개통되면서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 감영이 있던 상주를 밀어내고 환대 받는 고개로 대접 받기 시작 했던 것이다.

추풍령이라- 세종실록지리지에 앞서 고려사에도 언급된 이 고개는 남쪽 비탈이 가파르다의 '가파름'에서 빌려온 가을바람의 고개, 추풍령은 토지가 척박하여 메밀농사를 많이 짓다보니 새 하얀 메밀꽃이 만개할 때 얻어진 이름 백령(白嶺)을 대신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옛말에 산신이 살만한 곳은 길처(吉處) 명당이요, 나그네가 쉴만한 처소는 고개라 했다. '구름도 쉬어 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머물고 쉼이 자유로운 추풍령은 일상사 잠시 내려놓고 걸어 볼 만한 길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추풍령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바람처럼 차량행렬이 줄을 잇는 고개가 되었으니, 참 좋은 이름을 얻은 셈이다. 새콤달콤한 것이 세상맛이라고, 유혹하는 자동차 행렬들….

오는 봄을 시샘 했는지 늦추위가 바람을 휘두르며 기승을 부린다

성난 황소 콧김같은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괘방령 고갯마루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냥 몸 가누기조차 힘이 든다. 대단한 추위를 몰고 온 꽃샘바람이다.

가성산(710m)까지는 밋밋한 능선길이다. 몸을 움츠리고 2시간여를 걷다보니 주위풍경조차 눈길 줄 여유가 없다. 산 아래 고속도로엔 차들이 바람소리로 질주한다. 느림보다는 빠름이 세상을 살아가는 척도가 된 마당에 백두대간 산행을 하고 있는 우리를 새콤달콤한 것이 세상맛이라고- 승용차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굳이 9시간 가까이 우보행(牛步行)을 하고 있느냐고- 유혹을 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리라. 느림이 주는 지혜와 완경(玩景)을 즐기려는 욕심이 어찌 보면 우공이산 아닌가 싶다.

멀리 추풍령 휴게소가 숨어있듯 보인다. 그리 멀지않은 봉우리가 장군봉(606m)과 눌의산(743m)인 것으로 짐작 된다

세상사 그렇듯이 수리가 지나치면 곤궁해지는 법. 산도 마찬가지다. 그냥 걷다보면 장군봉과 눌의산이 밟힐 것이요, 넉넉잡아 2시간이면 추풍령으로 내려설 것이다.

출발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왼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진다. 지난번에도 산행거리가 10km 가까이 되니 통증이 시작되어 진통제로 견디곤 했었는데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 온 것이다.

언제 다쳤는지 그리고 왜 아파오는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생의 모든 흔적들은 그렇게 몸속에 각인(刻印)된다 했다. 오래 걷다보면 길이 지도가 되듯 몸은 삶의 지도가 된 것이다. 몸은 마음처럼 거짓을 하거나 숨기질 않는다. 사실 알고 보면 정직한 것은 마음의 지도가 된 몸이다.

추풍령에 내려섰다.

한때는 경부선 철도부설과 일본인들의 왕래가 잦아 꽤나 번잡했던 곳이었건만 고속도로가 생긴 후엔 한적한 시골마을로 전락해 60년대식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풍경은 아직 낯이 설다. 추풍령 노래비 표지석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주민등록증 사진처럼 표정들이 엄숙하게 된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으리…' 서로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대간산행이 너무 힘들어 살아서 언제 다시 이 능선을 다시 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쪽 구석이 뭉턱 잘려나간 금산(370m)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런저런 사연으로 몸을 반쪽이나 내어주고 간신히 이름만 걸쳐 있는 산이다.

지척에 있는 추풍령 저수지가 거울이 되어 준다면 금산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옛사람들은 함부로 제 모습을 물속에 비추지 마라' 무감어수(無鑒於水)라 했다. 사람이 아닌 즉 감어산(鑒於山)이라고 해야 할까.

물을 보지 말고 산을 보라했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상처받은 몸으로 견뎌야하는 금산을 생각하니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 있을 때처럼 인간의 무지함에 온 몸이 떨려온다.

아직도 남은 거리가 이십 여리나 된다. 산들이 낮다고 우습게보다간 콧등치기를 당하기 십상이리라. 사기점고개를 넘어 동쪽을 가로막고 버티고 선 난함산(733m)을 오르는 산복도로를 타고 추풍령면 작점리와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오늘 산행의 마침표가 된다.

시골 한갓진 작점고개는 다음 산행을 위한 쉼표도 되는 곳이다. 마침표는 끝이고 쉼표는 시작이다. 결국 山行의 시작과 끝은 하나인 셈이다

길 떠남(Travel)과 고난(Travail)의 어원은 같다. 그래서 일까 어떤 의미에서 산행은 수행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

조관형 수필가·동해펄프산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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