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가 작업장서 갤러리
진화바람개비·명태등 철조각품 세워진
300여평 잔디정원 그대로 전시장

합천군 가회면 신기마을에 작은 미술관이 있다. 마을 뒷산 황매산 기슭에서 불어오는 바람길에 앉아있다. 키 큰 철제 바람개비가 앞뒤뜰 가득 꽂혀 있는데 산바람이 잠시라도 가만두지 않는다. 딸그락거리는 바람개비 소리에, 정원수에 매달려 칭칭 울리는 풍경소리가 보태진다. 바람이 지나며 소리로 흔적을 남기는 곳, 바로 바람흔적미술관이다.

미술관 사진이 퍽 인상에 남아서 책상 위에 붙여놓고 몇달 간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소문만 듣고 찾았던 여행지가 실망만 안겨준 경험이 많았던 터라 애써 기대치를 낮추었다. 예상대로 미술관은 생각보다 근사하지 않았고 옛스런 냄새도 짙지 않았다. 갤러리와 마당에 놓인 조각품들을 둘러보는 데는 20여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 속에 잔상이 맴돌았다. 다음 계절, 또 그 다음 계절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또는 권위를 버리고 일상의 쉼터로 그대로 남을 수 있을지 자꾸만 사람마음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10년 전 한 설치미술가가 '바람흔적'이라는 작품을 세운 뒤 자신의 작업장을 처음 만들었다. 주인이 두세번 바뀌었고 지금은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 합천에 돌아온 정창수(60)씨의 소유가 됐다. 운영자는 다르지만 여전히 미술관은 처음 방식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잔디가 깔린 300여평 정원에는 바람개비 말고도 명태, 수건, 물그릇을 본딴 철제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오랜 시간 부식된 탓인지 아니면 지난 비바람이 너무 거센 탓인지 쓰러진 조각을 다시 세우고 땅을 다지느라 한창 작업 중이다. "웬 사람들이 이리 계속 와?" "여기 바람소리 들으려고 전국에서 찾아 온다잖아" "참 별나네" 인부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1층 갤러리에는 만화같은 그림 몇점이 전시돼 있다. 20여평 실내는 회벽에 대리석 조각을 아무렇게나 붙인듯한 바닥이다. 조명은 꺼져있고 길쭉한 창문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대여료는 없다. 직접 찾아와 일정표를 확인한 뒤 빈 자리를 먼저 예약한 사람이 갤러리를 이용한다. 작가를 설명한 짤막한 설명서가 있을 뿐 큐레이터는 없었다.

2층은 차를 마실 수 있는 쉼터다. 삼면이 창이라 마을 전경이나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역시 관리자는 없다. 한약 냄새만 진동한다. 누군가 금방 불을 끈 모양인지 항아리 속 한방차가 뜨끈뜨끈하다. 감초, 계피, 구기자 등을 달인 '미친차'라 소개한 글귀가 보인다. 아름다울 미(美)자와 친할 친(親)자를 썼다. 예쁜 이름에 혹해서 한 모금 마셨지만 사실 맛은 좀 없다. 커피믹스와 녹차 티백도 있다. 직접 끓여 마시고 찻잔도 다음 손님을 위해서 손수 씻어두라 당부해 놓았다. 차값 계산은 쉼터 중앙에 놓인 절구통과 양심껏 해결하란다. 통 안에는 앞 손님이 놓고간 천원짜리가 몇장 놓여 있다.

아이들은 3층 옥상과 통하는 동그란 계단을 오르내린다. 잔디밭을 오가며 작품에 매달리기도 한다. 미술관 앞 조그만 개울에서 아이들은 더 신난다. 개울물은 제법 넉넉하고 맑기까지 하다. 손바닥만한 고기가 잡힐 듯 도망다닌다. 양말을 벗고 고기를 좇아보지만 헛수고다. 밥 때가 지나서 식당을 찾아 나서려니 물 속에 발을 담구고 있던 아이들이 고기를 낚은 뒤 가자고 조른다. '번거롭더라도 도시락을 준비해 올 걸'하는 후회가 든다. 요즘 등산에 재미를 붙인 남편은 황매산 모산재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이런 산세는 처음 봤다는 둥 , 산을 오를테니 먼저 울산으로 내려가라는 둥 자꾸 농담을 건네는 폼이 조만간 다시 이곳을 찾을 태세다. 식당 아저씨가 곧 절정이 될 황매산 철쭉 자랑을 한참 늘어놓자 더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주변 볼거리

▷합천호=합천호 백리 벚꽃은 끝물이다. 그래도 이번 주말까지는 떨어지는 꽃잎을 보려는 나들이객이 많을 듯. 찻집이나 식당,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풀밭 등 곳곳에 한나절 휴식공간으로 알맞은 장소가 많다.

▷영암사지=웅장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삼층석탑과 쌍사자석, 돌계단, 주춧돌 등 천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가 남아있다. 입장료는 없다.

▷영상테마파크=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동막골>, 드라마 <패션70's> 등을 찍은 곳이다. 매주 목~금요일 드라마 <서울 1945>제작진을 볼수 있다. 시대극 촬영지라 다소 황량한 느낌이 든다.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진입한다. 고령나들목에서 빠져나오면 합천호, 황매산, 영상테마파크 등이 30km 남았다는 알림판이 있다. 25~30분 달리면 합천군소재지, 영상테마파크, 합천호가 나타난다. 합천댐 물홍보관을 지나 황매산(삼가, 가회면)방향 1089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5~7분 달리면 모산재 입구(영암사지)와 바람흔적미술관 알림판이 나온다. 울산에서 합천호까지 2시간 30분 소요.

식당

▷모산재식당=황매산 모산재 입구 도로변에 있다. 영암사지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우렁된장찌개가 특히 맛있다. 비빔밥, 파전 등 모든 메뉴가 각 5천원. 055·933·1101.

글·사진=홍영진 주부리포터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