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역서 11시28분 출발 영주역서 강릉행 환승
정동진역 하차후 둘러보고 나가야 요금 안물어

어릴 적, 먼 곳을 갈 때 버스와 기차 중 어느 것을 타고 갈지 어머니가 묻곤했다. 우리 삼남매는 "기차요~"하고 한 목소리를 냈다. 버스는 빈 자리가 부족했다. 늘 어른 무릎에 얹혀야 했다. 그에 비하면 초록색 커버의 기차 의자는 참 아늑했다. 멀미도 덜했다. 삶은 옥수수나 바나나 우유를 맛볼 수도 있었다. 흐뭇했던 기억은 까마득한 옛일이 된 지 오래다.

방학을 맞은 일곱살 아들이 기차여행을 가자고 한다. 한번도 기차를 타본 적이 없어서 묘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참에 '기차를 타고 떠나요…'등 방학숙제가 적힌 안내장을 보고 안달이 난 모양이다.

여행지는 정동진이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벼르던 곳이니 한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눈도장을 찍고 돌아와야, 미련도 사라지고 더이상 연연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울산역에서 출발하는 밤기차를 탔다. 난생처음 기차를 탄 아이들은 잘시간을 넘기고도 아직 눈이 초롱초롱하다. 매끄러운 초록색 의자는 없다. 마주보고 앉으려 등받이를 제치던 옛날 방식도 달라졌다. 의자 자체가 180도로 빙그르르 돌아간다. 별 것 아닌데도 아이들은 감탄 연발이다. 운전대 잡은 아빠 뒤통수를 보며 여행을 다녔는데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아이들 눈빛이 반짝거린다. 빵이며 음료, 아이스크림이 담긴 카트를 처음 본 것이다. 이리저리 먹거리를 살피는 표정이 낯익다. 노란 우유통을 찾던 내 모습이 꼭 그랬을 것 같다.

영주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시간은 새벽 3시, 정동진 가는 밤기차는 이 곳에서 갈아타야 한다. 이미 울산역에서 티켓팅을 했기 때문에 역까지 나가지 않고 플랫폼에 서 있으면 된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강릉행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삼순이가 나왔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새벽녘 이 곳 국수를 맛나게 먹던 장면이 생각났다. 불켜진 매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기분이 영 낫다. 속이 허하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아빠는 맛도 못보고 아들놈에게 국물을 다 내주고만다.

기차가 새벽 어스름이 벗겨지는 산촌을 달린다. 이슬에 젖은 나무며 밭작물, 오막살이 등 아침 풍경이 그림같다. "단풍이 들때 여유롭게 다시 오자"며 아이아빠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데 스위치 백(Swich Back)구간에 접어 들었다며 기차가 멈춰선다. 태백산맥에 자리한 통리~홍천~나한정역 구간으로 3백여 미터나 고도차이가 난다. 갈지(之)자 철로를 따라 거꾸로 뒤꽁무니부터 달리고 잠시 쉬었다 다시 앞머리로 달리기를 반복한다. '만약에 제동에 문제라도 생기면?' '설마.몇십년을 이렇게 다녔는데…' 등 얄궂은 생각들이 오간다. 옆자리 꼬마들은 세상 모르고 새우잠 을 자고 있다. 내년 터널공사가 마무리되면 국내 에서 유일한 이 구간은 폐쇄된단다. 돌아가는 기찻길에선 꼭 설명을 해주어야겠다.

드디어 정동진이다. 날은 이미 훤하다. 예상대로 철로 주변은 아치형 전주가 드리워진 신식으로 바뀌었다. 사람들도 넘쳐난다. 고즈넉하진 않지만 깔끔한 정동진역에서 아침을 맞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돌아오려고 출구로 나서는데 함께 내린 아가씨들이 말린다. 다시 들어오려면 입장료를 내야하니 아침 정취를 맘껏 즐긴 뒤 나가라는 것이다. 부랴부랴 잠이 덜 깬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철로나 모래시계 소나무를 오가며 사진을 찍는다. 바닷가를 향해 돌아앉은 연인들도 꽤 많다. 좀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난리다.

순두부로 식사를 해결하고 아이들과 바닷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닷가와 가장 가까운 역이지만 철로에서 바로 모래사장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십여분 정도 마을을 둘러가야한다. 해수욕장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해안선 모래밭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른 시각이라 사람도 뜸하다. 한적한 바닷가 물놀이에 아이들이 제일 신난다. 대여한 비치파라솔은 파도가 들이치는 물가에 쳐졌다. 연초 해맞이 코스로도 좋겠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여름철 정동진 해수욕장이 훨씬 만족스러울 것 같다.

****여 행 수 첩*****

* 주변볼거리

정동진 역에서 택시를 타고 5분여 달리면 언덕 위 썬 쿠르즈에 도착한다. 숙박지로 활용되는 썬 쿠르즈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실내 레스토랑과 선물의 집 등도 훌륭하다. 앞, 뒷마당에 산재한 조각품과 조경, 전망대에서 둘러보는 정동진 주변 경관은 입장료(5천원)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쿠르즈 말고도 배 한 척이 더 있다. 에디슨소리박물관으로 활용되는 하얀 돛배다. 3층 전시공간을 다 돌고나면 마치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어두운 실내조명과 삐걱거리는 계단이나 마룻바닥이 인상에 남는다. 예술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축음기(사진)와 자동차, 조명 등 갖가지 초기 발명품 등이 빼곡하다. 대중교통이 따로 없어 돌아오는 차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역으로 돌아 올 택시편을 미리 마련해 놓아야 편리하다.

* 교통편

늦은 밤 11시28분 울산발 무궁화호를 타고 출발, 영주역에서 환승한 뒤 다음 날 아침 7시에 정동진에 도착한다. 유치원생 이상의 아이라면 하룻밤 기차여행 정도는 무난하다. 돌아오는 교통편은 낮 12시40분 정동진발 울산행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한 시간여 뒤 열차가 또 있지만 대구에서 내려 버스로 귀가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왕복 운임비는 4만3천300원, 아이는 반값이다.

홍영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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