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자리한 순흥주민 산신각 짓고 단종 넋 기려
표고차 적어 완만한 산행…고요함 즐기며 걷기 몰두
봉황산 기슭 부석사 소백산맥 앞뜰 맞이한 배치 절경

고치령 북쪽 영월과 남쪽 순흥 사람들은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어 태백과 소백산신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고치령에 산신각을 짓고 지금도 해마다 제(祭)를 올리며 구천으로 떠도는 혼령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냥 고개가 아니라 옛 고개(古峙)다. 단종복위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한 때는 도호부가 폐지되기도 했던 순흥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이 있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아마 나이가 오십대 전후세대라면 어릴 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너- 어데서 왔는지 아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단다'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을 텐데, 그 다리가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청다리'인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말인 즉은 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이 인근 처녀들과 정분이 나서 애가 생기면 다리 밑에 놓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양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생겨난 말이라 한다.

그래서 일까? 고치령 산신각 앞에 서있는 태백대장군 장승 아랫도리에 옹이로 장(將)자 마디촌(寸) 점 대신 남근 상을 새겨놓은 것을 보고 대원들은 허릴 잡고 웃는다. 누군가 심심풀이로 그랬을 것이다.

도리기재 까지는 26km로 다소 먼 거리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표고차가 적다는 것이다. 고치령의 표고가 760m, 가장 높은 옥돌봉이 1264m이니 걷기에는 좋은 완만한 코스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코앞은 이내 된비알이다.

950봉을 올라 미내치를 지나 중식예정지인 1057봉까지 4~5시간여 거리는 부드러운 산길이다. 숲 속은 서기(瑞氣)가 느껴질 만큼 바람이 상쾌하다.

엊저녁 단비로 숲은 젖어있고 길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도 적막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길은 묵언정진을 하고 있는 스님을 닮아간다. 대원들도 수행 중 가장 어렵다는 묵언을 즐기고 있는 냥 걷기에 몰두하고 있다. 숲은 침묵이다.

하늘을 막아선 참나무들이 맘껏 키재기를 하고 있다. 숲은 끝없이 다투면서 길을 막아선다. 그러나 나무는 저들끼리 상처를 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나무들이다. 끝내 산길은 나무속에 갇히고 만다.

나무 나무 나무관세음보살… 그 편안한 숲 소리를 사바세계 소리 인 양 평생 듣고 살아왔으니 이청득심(以聽得心), 나무라도 관세음보살로 성불했으리라.

오늘 점심은 늦은목이 앞 능선 1057봉에서 하기로 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없다면 지루하게 느껴졌을 텐데, 그럴 때마다 오르막은 땀을 흘리게 한다. 부석사로 내려가는 봉황산 능선 갈림길인 갈곳산(966m)까지는 7시간이 소요되었다.

봉황산 기슭엔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가 있는 곳이다.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영예는 얼마 전 천등산 봉정사 극락암에 주었지만 아직도 최고(最高)의 건축으로 평가받는 무량수전이다.

혜곡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부석사의 건축미를 사무치게 고마워했으며, 유홍준 교수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나타난 햇살과도 같은 절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석사는 소백연릉을 무량수전 앞뜰로 끌어들여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경관과 가람의 배치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절이다 .

시간이 있으면 석양에 안양루 윗쪽 삼층석탑에서 용마루에 걸리는 붉은 노을을 보라 했다.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極樂)의 또 다른 이름이니 그곳에서 바라본 일몰풍광이 극락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죽하면 그 풍경에 취해선지 무량수전 부처님도 옆으로 돌아앉았다 한다.

선달산(1236m) 정상이다.

선달은 뜬돌(浮石)의 토박이 말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혹자는 신선이 놀던 산(仙達山)이라 한다. 멀리 태백산과 함백산도 조망된다. 선달산에서 보부상들이 넘나들었던 박달령을 지나 옥돌봉까지는 30~40리 길, 오늘 목적지 도리기재까지는 시간상으로도 빠듯하게 느껴진다. 더구나 선달산에서 옥돌봉 까지는 8km, 오랜만에 외출 나온 노스님처럼 포행(布行)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만개한 철쭉 볼 시간도 없이 걸음을 재촉해야했다. 산행도 세상사와 같아 속도에 욕심을 부리면 풍광은 놓치기 마련이다.

옥돌봉(1242m)에서 일몰을 맞이했다. 석양은 운무에 갇히고, 오늘 해떨어짐이 19시33분인지라 도래기재까진 아직 1시간이상 소요 될 것 같은데... 대원들은 걱정을 앞세우면서도 마지막 소주잔을 비운다. 산은 이내 어두워진다.

빈잔 속으로 어둠이 조금씩 채워졌다.

계곡에서 산짐승 소리가 들려온다. 울음소리로 봐서 꽤 덩치가 큰 짐승 같다.시간이 갈수록 어둠은 소리를 키우고 있었다.

'꾸우꾹- 꾸우 꾹-.'

누군가 산돼지 소리라 했다. 어떤 산짐승들은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으려 배설물조차 땅에 묻곤 하는데, 저놈은 오히려 '나 여깃소-' 큰소리를 질러 대고 있다. 그래서 저돌적(猪突的)이라는 표현을 했을 게다.

사는 것도, 대간산행도 때론 저돌적이어야 할 때가 있어야 한다는 듯이….

조관형 수필가·동해펄프산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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