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문화제의 명칭이 울산의 대표축제로서 걸맞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처용문화제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또는 처용문화제가 울산의 대표축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처용이 울산의 대표축제로서의 명칭에 걸맞지 않은 이유가 외설이라 하고, 그 근거를 '신덕왕 등극설'에서 찾고 있는데 대해서는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자 개인의 견해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학문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울산시민들에게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처용설화 외설론'을 주장하는 울산대 김진 교수의 논거는 ①처용설화는 신라왕실의 문란한 성풍속이 반영된 외설이다. ②처용설화는 무속신앙적 요소가 많아 종교적 편향성이 있다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처용설화는 외설이며, 무속신앙적 요소가 많아 울산의 대표축제가 갖추어야 할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외설론'을 검토해 보면 박인희교수의 처용설화의 '신덕왕등극설'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반론의 사전작업으로 박교수의 등극설을 먼저 살피기로 보기로 한다. 등극설이 허구임이 밝혀지면 외설론 또한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박교수의 등극설은 처용=울산호족 문원, 처용처=신덕왕의 어머니 정화부인, 역신=신덕왕의 의부 예겸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다. 문원과 예겸이 정화부인을 둘러싼 삼각관계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효공왕 사후 문원의 아들 경휘를 왕위에 올렸으니 그가 신덕왕이라는 것이다.

이 논지는 중대한 허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울산호족 문원이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면 울산의 지방세력이 중앙 귀족세력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방세력의 왕권 장악은 신라정치사를 수정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데, 신라사 전공자들이 학계에 보고한 적이 없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박교수의 위의 가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박교수의 논지는 이러하다. <삼국사기>에는 신덕왕의 아버지가 예겸으로 되어있는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아버지는 문원이고, 의부(義父)가 예겸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신덕왕의 아버지는 문원과 예겸 둘이며, 이들이 정화부인을 둘러싼 삼각관계를 이루었는데, 이 관계가 처용처를 둘러싼 처용과 역신의 삼각관계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예겸=역신은 정화부인=처용처를 간통한 간부(姦夫)이다.

이 가설을 이끌어낸 키워드는 의부라는 용어인데, 박교수는 이를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간부'로 해석하였다. 여기의 의부는 신라시대 사료에는 위의 <삼국유사> 왕력편 외에는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 와서야 명종 23년(1193)의 금석문에 의부의 뜻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이승장(李勝章)의 어머니는 전부(前夫)와 사별한 후 소생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이승장은 새 아버지를 의부라 불렀다(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 이승장묘지명,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274쪽). 의부는 '남편을 사별한 여자가 재혼했을 때 전부 소생이 새 아버지를 부르는 칭호'였던 것이다. 신라후기~고려중기의 가족제도에 특별한 변화가 없었으므로 이 해석은 예겸과 경휘의 경우에도 유효하다.

이로써 예겸은 정화부인이 전부 문원이 사망한 후 재혼한 남편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예겸=역신=간부 등식은 무너지며, 따라서 문원과 예겸이 결탁하여 경휘를 왕위에 올렸다는 등극설도 근거를 잃게 된다. 사망한 자의 정치활동은 가당치 않으며, 재혼한 남편을 간부라 기록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교수의 등극설은 의부의 용례를 검토하지 않은 채 쌓아올린 모래성에 불과하다. 김교수의 처용설화 외설론은 이 허구의 등극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되어있다. 사상누각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송수환 역사학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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