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올라가면 배우는 수학 내용 중에 '명제'라는 게 있다. 초등학교 때 너무도 당연하게 배우던 산수적이고 기계적이던 수학에 처음으로 논리가 적용돼 아주 헷갈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칙연산 수준에 머물러 있던 산수적인 배움에 수학적 논리가 더해져 처음에는 아주 어렵게 생각하다가 조금씩 깨우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게 수학이구나, 논리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중학교에서 처음 배웠던 '명제'와 관련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명제'란 참,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정확한 논거, 문장 따위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주관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다. 객관적이고 논리체계를 갖춰야만 한다. 꽃이 예쁠 수 있으나 이는 내가 보는 시각이고, 다른 사람은 내가 예쁘다고 하는 꽃을 예쁘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대성을 처음 발견한 것도 중학교 때 '명제'를 배우던 수학 시간이었다.

'어떻게 꽃이 예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반감이 있었지만 꽃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나의 주관처럼 꽃이 예쁘지 않다는 다른 사람의 시각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느꼈던 생각의 성숙에 괜히 우쭐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내 생각처럼 상대방도 꽃이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후 가슴 한 켠에 느꼈던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찼다. '내가 크고 있구나, 내가 배우고 있구나, 배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난 주 울주군 지역의 한 중학교가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국정감사가 한창인데도 농촌지역의 작은 중학교가 언론의 주목을 끈 것은 학교 교육의 직접 당사자인 학부모운영위원들이 자녀들의 체벌을 허용해 달라는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학부모 운영위원들은 사랑의 매에 찬성한다는 결의문까지 전체 학부모들에게 보냈다. 학교 측은 동의서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적극 해명에 나섰다. 학부모 위원들이 결의문을 만들고 동의서 받는 것을 학교측에 의뢰해 와 학교 측은 이를 도와줬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는 원칙적으로 체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도 밝혔다. '체벌 동의서(학부모 운영위원 측은 사랑의 매라고 주장)'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 학교 현장의 통제불능 상태와 자신의 자녀라도 필요하다면 매를 대 달라고 하는 학부모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현재 학교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중학교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학교 교육에 처음 발을 디딘 보호받는 존재로서의 초등학생 신분을 벗어났지만 고등학생처럼 청소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호받는 초등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단계가 중학교 교육이다. 어떤 교사들은 고등학생에게 어울릴 만한 엄격한 잣대를, 어떤 교사는 이제 막 초등학생 티를 벗어난 상태임을 감안해 사랑의 시각으로 교육한다. 무엇보다 많은 중학생 스스로도 자신들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기 일쑤다. 이같은 중학교 교육 현장의 일탈이 오죽했으면 학부모들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자녀라도 필요하다면 때려달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사랑의 매'는 '명제'가 아니다. '사랑'은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런데 '매'는 사람이나 짐승을 때리는 막대기, 몽둥이, 회초리 등을 일컫는다.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과 짐승이나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같은 문장 안에서 서로 수식하는 조합을 이룰 수 있는가. 서로 수식하기는 커녕 아예 배치되는 뜻을 담고 있지 않는가. '명제'가 될 수 없다.

교육의 기본은 사랑이고 신뢰다. 사랑의 매는 명제도 될 수 없을 뿐더러 이같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 사이의 사랑과 신뢰의 끈을 아예 끊어버릴 수도 있다.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는 사랑과 신뢰가 바탕을 이뤄야 한다. 그것을 잃어버린 스승과 제자, 학교 현장을 어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박정남 사회부 차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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