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 유랑의 끝이 보이다 - 이병직 전 울산교육장

1962년 현 동강병원 뒤편 반탕골서 ‘큰 돌덩어리’ 발견돼
부산 도청에서 문화재 반환 지시 정원석 대접 ‘찬밥신세’
60년대 중반 학성공원 귀환 담배꽁초만 수북 수난 연속
문화재 인식 부재의 결과 … 시립박물관서 관리·보존 기대
▲ 학성공원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 앞에서 이병직 전 울산교육장(가운데)과 박채은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왼쪽)이 부도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술사(口述史)는 과거를 정리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수 백년 전의 역사는 문헌이나 유물이 확인해주지만 근대 역사는 살아있는 이들의 기억과 그들이 들려주는 구술(口述·이야기)로 정리된다.

‘구술로 정리하는 울산 이야기’는 격동의 근대를 거쳐 전국 최강의 도시로 거듭 난 울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는 취지다. 문화, 예술, 교육, 정치, 경제 등 오늘의 울산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았을 원로들이 본보가 추진하는 ‘기억의 재현’ 속으로 기꺼이 동참한다. 잊혀졌던 혹은 묻히었던 이야기들이 지역사 발굴에 새로운 활력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편집자 주

이병직(李秉稷·86) 전 울산교육장은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놓인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太和寺址 十二支像浮屠·보물 제441호)와 깊은 인연이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부도가 유일하다. 몸돌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안쪽으로 깊숙히 파놓아 사리를 모셨다.

문화재청 자료는 이 부도를 ‘태화사터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짧은 소갯글 속에는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이 빚어낸, 부도의 웃지못할 유랑기(流浪記)가 함축돼 있다.

■부도, 산 아래로 내려오다

때는 1962년.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장학사에 오른 이 전 교육장이 장학계장, 학무과장으로 승승장구하며 울산 교육계의 중심축으로 다가설 무렵이었다.

현재의 울산동강병원 뒷편에 반탕골이 있었다. 대숲과 초가 몇 채가 전부였던 그 곳에서 큰 돌덩어리가 발견됐다.

키는 남자 어른의 허리춤에 닿았고, 둘레는 두 명의 장정이 두 팔을 벌려야 껴안을 수 있었다. 외형은 종

▲ 이병직 전 울산교육장이 남구 신정동 자택 서재에서 보물 제441호로 지정된 태화사지십이지상부도의 유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鐘)이나 저울에 달린 추(錘)와 흡사했다. 몸통 가운데는 구멍이 옴폭 파인데다 둘레를 빙 돌아가면서 십이지신상이 양각으로 새겨졌다.

비탈진 땅인데다 그대로 두자니 경작을 해야 할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옥교동에 살았던 김달오라는 이가 당시 학무과장이던 이 전 교육장을 찾아 와 ‘제발 산 아래로 돌덩어리를 내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5·16 혁명이후 교육청이 사라지고, 울산시청 내 교육과에서 교육·문예·역사 업무를 모두 소화할 때입니다. 문화재나 역사인식이 부재할 수 밖에 없었지요. 현장에 가보니 막막합디다. 장비나 좋습니까. 도르래에 쇠사슬을 매달아서 죽을 고생을 해 내려 놓으니, 경남도청이 문화재를 즉각 반환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닙니까.”

■도청 정원석이 된 십이지상부도

당시만해도 경남도청 소재지는 부산이었다. 도청 앞마당에 부도를 부리니, 도청 관계자들이 우왕좌왕 놔 둘 곳을 그제서야 찾았다. 그렇게 안착한 곳이 바로 정원 한 귀퉁이였다. 통일신라 태화사지 출토 부도가 생뚱맞게도 연고도 없는 부산소재 도청의 정원석으로 지내야 했다.

수 개월 뒤, 부산이 경남에서 분리되기로 결정됐다. 당연히 도청소재지도 부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야 할 판.

“부산직할시가 되면 관할 소재 모든 것들이 부산시 소유로 바뀌는 겁니다. 도청의 지인이 아무래도 되가져가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지요. 아마 이맘 때쯤 되지않았나 싶어요. 날씨가 꽤 추웠습니다. 그 놈의 부도를 다시 울산으로 갖고 와야겠는데, 마음은 급하고 차량수배는 안되고…. 직할시 승격을 사흘인가 앞두고 겨우 울산으로 되찾아 왔습니다.”

■되돌아 온 부도, 학성공원 꼭대기에 오르다

▲ 보물 제441호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
되돌아 온 부도는 여전히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다행히 60년대 중반 학성공원이 재개장하면서 그 곳으로 옮져지게되었고, 발굴 이후 4년이나 지난 그 때 보물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그 것이 끝이 아니었다. 공원 입구를 지키던 부도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구박덩이 신세를 면하나 싶었는데, 옴폭 파인 감실은 담뱃꽁초만 넘쳐났다. 어떤 취객들은 아궁이 삼아 불까지 피워댔다. 부도 표면이 숯검댕이로 거멓게 변했다.

사람 손이 많이 타는 입구에서 공원 꼭대기로 이사를 했다. 한 줄짜리 울타리도 부도만큼 키가 큰 철책으로 바뀌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갇힌 꼴이 돼버렸다.

김 전 교육장은 고고학자인 황수영 교수와 절친하게 지내면서 문화재 인식을 달리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시립박물관 개관, 유랑생활 마침표 되기를

유적지를 함께 둘러보며 부도발견 당시 반탕골 주변을 더 진중하게 조사하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감실을 덮는 뚜껑이나 열쇠 등이 있을진데, 덩그러니 돌덩어리 하나 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요. 감실 주위에 파인 홈을 보면 덧대어진 부속물이 분명히 있었다고요. 개발에만 눈이 멀어 그대로 뒤엎어버린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회여건상 문화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리 만무했다. 5·16혁명 전후 문서관리규정에는 일정기일이 지난 모든 문서는 폐기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역사인식의 기초를 다져도 모자랄 판에 기록물을 맘놓고 엿장수에게 맡기던 시절’이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울산시립박물관 곧 개관한다는 것. “시립박물관이 만들어진다고 했을때, 이제야 부도가 제자리를 잡겠구나 싶었지요. 아무쪼록 십이지상 부도의 유랑이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끝을 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홍영진기자 [email protected] 사진=임규동기자 [email protected] 자문=박채은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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