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왕조의 숨결 느껴지는 수원화성

개혁정치 추진하던 정조 임금 신도시 건설 통해 이상 구현
정약용 등 젊은 실학자 공사 담당 당대 최고 건축기술 도입
한국전쟁 거치며 방치되다 세계유산 지정되며 명성 되찾아
▲ 수원화성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화홍문. 일곱개의 홍예수문 아래로 수원천이 흐른다.
여행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여행의 즐거움이 기억의 되새김질로 거듭 살아나 평생토록 감동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예전에야 어려웠지만, 요즘엔 자녀를 동반한 가족 여행이 그야말로 붐이다. 참 여행의 기쁨과 여행에서의 경험담이 자라날 아이들에게 세상을 알아가는 지혜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지가 교과서 속 문화유적지라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가족 간의 유대감은 물론이고 책으로만 배우는 학교 교육이 보고 만지는 산 교육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에 본보는 현대예술관 한마음회관 내 교과서탐방팀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교과서 속 여행지를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정조의 꿈 수원화성

수원행궁은 지을 때부터 전체 행궁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 규모와 아름다움은 한양의 궁궐과도 견줄만 하였다. 수원화성은 축성을 주도한 조선조 정조의 철저한 계획 아래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왕조 역사상 최장기 집권(52년)의 기록을 지닌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과 보호 아래 군왕으로의 자질과 덕목을 교육 받았다. 이렇게 자라난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군주로 성장한다. 본인의 노력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행운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면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왕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세력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있었다. 당대의 정치는 노론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이들이 자리잡은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의 꿈을 펼칠 곳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쌓고 신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곳에서 정조는 젊고 유능한 인재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용감한 군대로 무장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정치를 꿈꾸었다.

정조의 원대한 꿈으로 탄생한 화성. 그리고 행궁에선 국가적인 거대 행사가 펼쳐졌다. 바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펼쳐졌다. 정조는 곤룡포 대신 융복을 입고 4일 만에 이곳에 도착한다. 그 후 나흘 동안 이곳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열었는데 과거시험, 사도세자 무덤인 융릉 참배, 밤낮에 걸친 두 번의 군사훈련, 어머니의 회갑잔치, 지역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과 소금을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를 실시하였다.

겉으로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행사였지만 속으로는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달래고 나아가 아버지를 죽게 한 노론을 향한 준엄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되살아 난 정조의 꿈

수원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화성을 등재하면서 ‘18세기 군사 건축물을 대표하며 당시 유럽과 아시아 성곽의 특징을 잘 조합한 역사

▲ 정조의 행궁 행렬을 묘사한 벽화.
적 중요성을 지녔으며, 동양에서는 ‘만리장성’ 외에 비교가 불가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화성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문을 내었다. 바로 장안문(북), 팔달문(남), 화서문(서), 창룡문(동)이다. 독특하게도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의 기능을 담당한다. 북쪽인 한양에서 내려오는 왕이 제일 먼저 다다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안문은 불타버린 숭례문보다 규모가 더 크고 우람하다. 또한 숭례문에는 없는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성곽의 첫째 요건인 방어기능과 화려함을 동시에 자랑한다. 옹성을 따라 한 바퀴를 돌면서 ‘장안문’ 현판과 활짝 뻗은 우진각 지붕의 곡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위엄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원화성 중에서도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은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이다. 성안으로 흘러드는 수원천 위로 일곱 개의 홍예수문으로 이뤄진 화홍문을 세웠다. 동쪽산 능선에는 성 밖을 멀리 내려다볼 수 있는 방화수류정이 자리한다. 방화수류정은 높고 좁은 공간에 앙증맞다 싶을 정도로 작게 그러나 격식보다는 활달한 자태로 매우 단아한 모습을 갖추었다. 방화수류정 아래에는 연지를 마련하고 능수버들을 휘늘어지게 심었는데, 정자와 어울리는 그 맵시가 아주 운치있다.

◆화성축조의 뒷 이야기

이러한 화성 축성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건설비용이 부담이었는데 정조는 모든 공사비용도 왕실에서 충당하면서 백성이 살기 좋은 신흥 낙원도시를 꿈꾸었다. 여기에는 공사의 실무를 집행했던 실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그 가운데에서도 젊은 학자 정약용을 주목할 만하다. 당시 31세였던 그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당시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성곽을 축성해 냈다. 우리 성곽의 장점에 중국, 유럽 등 외국 성곽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성을 쌓았다. 자재를 운반하는 새로운 수레와 도르래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거중기를 고안했다. 화성에 쌓인 돌의 크기와 두께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데에는 당대 최고의 첨단 건축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덕분에 공사기간도 10여년을 예상했던 것을 2년 반으로 단축하여 정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수원화성의 오늘

하지만 화성 축조 5년 만에 정조는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그의 사후 많은 훼손이 일어났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 모습을 찾지 못할 정도로 방치되었다. 그러던 차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수원화성’이 지정되면서 행궁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수원시(市) 차원에서 복원사업을 벌인 결과 지금의 모습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 이석민 현대예술관 문화기획과 교과서탐방 지도자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화성이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는 기록의 왕조, 기록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선 왕조의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성곽의 설계과정, 실제 건물의 형태, 규격과 특징,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재료가공법,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예산 및 임금의 계산, 각종 공문서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됐다. 덕분에 후손들이 역사에 길이 남은 대공사의 전말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석민 현대예술관 문화기획과 교과서탐방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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