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신라 제49대 헌강왕

▲ 삽화=화가 박종민

헌강왕이 춤 추었다는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는 어떤 춤이었을까. 삶의 절정에서 왕(王)이 추는 춤은 과연 어떤 춤이었을까.

헌강왕 재위 당시는 민간에서도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동경(東京)으로부터 동해 어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히 늘어섰지만, 단 한 채도 초가집을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고 한다. 덕치를 펼친 헌강왕 시대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헌강왕은 56대 신라왕 중에서 가장 춤을 잘 추었던 왕이다.

처용은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서라벌로 데려간 설화속의 인물이다.

서울 밝은 달에 / 밤을 몰고 노닐다가 / 돌아와 내 자릴보니 / 다리가 넷이로다 / 둘은 내 것이로되 / 또 둘은 뉘 것인고 / 본래는 내사랑인데 / 앗겼으니 어찌할꼬 !

처용의 본고장 울산에서 다시 한 번 처용가를 외워본다.

울산 사람이면 누구라도 처용무 춤사위 한 자락은 춤출 수 있다. 팥죽색 붉은 피부에 하얀 치아를 드러낸, 목단화 2송이와 복숭아 열매 일곱 가지를 꽂은 탈을 쓰고 처용무 한 자락을 춤출 수 있다.

허이허이 너울너울 허공을 휘 가르고 저으며 해탈한 듯 초연한 모습으로 춤춘다. 발로는 의연하게 허공을 차기도 하고 땅의 지기(地氣)를 눌러 주기도 하며 무겁게 때론 가볍게 천 백여 년을 춤사위는 이어져오고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거동하였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때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은 볼 수 있어서 왕이 일어나 본받아 춤을 추었다고 한다.

왕이 추었던 그 춤을 어무상심무(御舞象審舞) 또는 어무상심무(御舞傷心舞)라고도 한다. 춤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어무상심무는 헌강왕이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인생의 절정에서 맛보는 기쁨과 행복을 노래한 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무상심무(御舞象審舞)의 춤사위가 처용무의 춤사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인생의 절정에서 한 고개 넘어서면 허탈해지는 인생의 허무(虛無)를 춤추었을 것이라고도 짐작해 본다.

신라 헌강왕이 즉위한 이후로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했다. 변경은 안정되고 국민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德)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고 백성들은 왕을 칭송했다.

그 때는 신라의 내리막길이 오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시기이다.

당시 신라왕은 누구의 부인이든 취할 수가 있었다. 여왕(女王)도 삼서(三)제도를 두어 남편 셋을 취할 수 있었던 시대이다.

춤을 잘 추었던 헌강왕이 왜 처용설화에 등장하는 것인가.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처용으로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상대가 자신의 아내를 취한 상황이어서 고통스럽고도 허탈해서 “본디 내 것이언 마라난 아사날 어찌 하릿고”하고 한탄했을 것이다.

월성에서 신하들과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기던 왕은 술이 거나해지면 어김없이 어무상심무(御舞傷心舞)를 추었다고 전한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용의 아내를 예술가의 상상력으로서는 헌강왕이 취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보리사 동남쪽의 헌강왕릉 주위를 걷는다. 나즈막한 나무들이 호위하듯 서있는 가운데 처용의 한숨 소리는 달빛에도, 바람에도 출렁이고 상심무(傷心舞)를 즐기던 왕(王)은 긴 잠에서 깨어 날 줄을 모른다.

달빛만 요요하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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