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김중업(金重業)

▲ 삽화=화가 박종민

누드를 즐겨 그린 르노아르는 ‘가슴이나 허리를 애무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인간의 본질적 존재감은 신체의 미적인 구조와 생명력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낳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인간의 신체가 갖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탐구할 영원한 미학(美學)적 과제다.

산과 강, 바다, 이 자연 속에서 자연 그대로 놓여나 살고 싶은 것 또한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젠가부터 인공구조물 속에 갇혀 살기를 희망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집이라는 건축물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무와 흙과 돌이 갖고 있는 자연적인 재료의 맛을 느끼며 자연이 갖는 선(線)의 미학(美學)을 생활 속에 누리면서 말이다.

우리의 한옥은 철저히 자연에 동화되는 인공구조물인 동시에 산과 강의, 흐름의 순리(順利)를 그대로 탄다. 앞으로는 강을 안고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에 기대고 앉아서 오천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진주 남강의 뒤벼리에서 경남문화예술회관을 바라보면 솔밭과 대밭, 강줄기의 어울림은 도심의 것이 아니다.

남강의 푸른 물빛에 또한 건축미의 조화라니, 촉석루 누각의 풍광에 못지 않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경남문화예술회관이다.

예술회관의 자리도 절묘하지만 프랑스 대사관을 연상케하는 회관의 건축미에 남강을 찾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하여 남강을 찾는 나그네의 심사(心思)는 가을바람과 더불어 언제나 소슬하다.

김중업, 그는 건축의 조형미와 회화의 미학이 서로 어우러진 작품을 남긴 우리시대의 거장이었다.

남강 변에 자리한 예술회관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가슴으로 사물을 느끼는 시대의 진정한 예술인이었다. 우리나라의 자연을 자신의 감각으로 소화하여 또 다른 예술형태로 쏟아내지 않고는 못배기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1952년에 UNESCO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 건축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건축사무소에서 1952년부터 3년6개월간 건축 및 도시계획을 유학하였다. 프랑스에서 서양건축을 공부한 그에게 있어 조선의 기와집 추녀는 그의 건축예술의 영원한 모티브였다.

김중업 그는 건물이고 뜰이고 나무고 간에 풍요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허리의 선과 같은 미감(美感)을 살린 건축예술가였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선의 흐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이어 김중업 그의 대표작이다.

프랑스 현대 건축계의 거장(巨匠) 르 꼬르비지에의 제자답게 김중업은 돌의 선문(線紋)까지도 하나하나 정성껏 살려서 장대석이며 판석(板石)을 놓았다.

그의 건축은 교양있게 쓰일 균형잡힌 육체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그의 예술적 감각은 아마도 건축을 공부하기 전에 수많은 인체의 구조를 공부하고 여체가 갖고 있는 즉, 누드에서의 선의 미학을 공부한 내공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남강 가에 우뚝 솟은 경남문화예술회관은 남가람 문화거리를 거느리고 서 있다. 진주성의 동쪽 기슭을 흘러가던 남강의 물결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휘돌아 흐르기 시작하면서 병풍을 두른 듯 깎아지른 절벽인 뒤벼리를 마주 바라보는 경남예술회관은 남강의 오묘한 풍치에 절정을 이룬다.

거기에다 예술회관의 건축미까지 보태어 더없이 소슬하다. 한 폭의 그림이 거기에 있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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