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황개(黃蓋)

▲ 삽화=화가 박종민

첫눈이 왔다. 눈이 펄펄 내리니 동화 속 나라 같다.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우리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적막한 풍요를, 바다 속처럼 깊은 고요함을 간절히 누리고 싶다. 아무 일 없이 한 열흘 정도만 눈 속에 갇히고 싶다. 그런 홍복이 내게도 내리기를 꿈꾼다.

일전에 대선주자의 한사람을 15년을 하루 같이 받들던 보좌관이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급변하는 세상인심 가운데서 15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을 수도 있지만 긴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충정으로 한 분의 윗사람을 모셨던 그 사람을 생각하니 적벽대전의 황개(黃蓋) 장군이 떠올랐다.

그 보좌관의 희생은 예상치 못한 불의의 사고였지만 모시는 한 사람을 위한 충정(忠情)은 황개의 고육계와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란 예감을 가졌다.

예우를 다하여 받드는 아랫사람의 충성심도 높이 살만하지만 15년을 하루같이 믿음과 신뢰로써 아랫사람을 부리는 주인의 도량과 덕성(德性)도 감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인간은 지극히 복잡한 동물이다. 지극히 이성적인가하면 지극히 감성적이고, 합리적인가 하면 충동적이고 이기적이다. 양자 모두를 지닌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吳)나라의 군사작전 회의에서 황개 장군은 화평론을 고집하다가 드디어 대장군 주유(周瑜)의 비위를 거슬러 목을 베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항복이라는 말을 내는 자는 가차없이 목을 베라고 한, 오왕(吳王) 손권의 엄명 또한 칼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장수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감녕(甘寧)은 목숨을 걸고 황개를 변호하였다. 모든 군사가 입을 모아 변호하여 황개는 태형(笞刑) 백대의 형(刑)으로 감해졌다.

손권의 진중에서는 황개의 살가죽이 터져 유혈이 낭자하였고, 조조의 이중간첩인 채중과 채화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가죽이 터져 피냄새가 진동하는 진중(陣中)에서 황개의 몸뚱이는 이미 주검이나 같았다.

황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스스로 대장군 주유를 찾아 고육계를 쓸 것을 헌책하였다.

조조군의 거대한 수채를 공격하는 방법은 연환(連環)과 화공(火攻)뿐이라고 하면서 고육계를 진언한다.

이때 이미 황개는 고령의 노장이었기에 장군의 충정어린 헌책을 받아들이기엔 대장군 주유도 몹시 망설였다. 주유는 백대의 곤장을 치면서 같이 울었다. 한 사람은 맞으면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한 사람은 때리면서 기절하였다.

조조가 믿을 수 있도록 조조의 첩자들이 보는 앞에서 백전노장(白戰老將)을 치는 대장 주유는 그야말로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황개를 쳐야만 했으니 보는 이들 모두는 고육계란 것을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그날 밤 황개는 참모인 감택을 시켜 조조에게 사항계를 보내어 투항할 의사를 전했다. 물론 조조는 이를 의심했으나 그때 마침 채중, 채화가 도착하여 황개가 맞은 사실을 고하자 의심 많은 조조도 진실로 받아들였다.

감택은 조조의 지시를 받고 진지로 돌아와 황개와 은밀히 의논해 오늘 밤 자시(子時)에 청색깃발을 단 범선을 타고 투항할 것이라고 밀서를 보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황개는 오나라 개국공신으로 쇠채찍을 사용하는 철편술에서 당대의 일인자였다. 손견의 인품에 반해 그를 따랐고, 손견이 옥새를 가지고 오다 유표에게 당하자 철편으로 유표를 사로잡았다. 황개는 손견, 손책, 손권 3대를 충성으로 맹세한 대장이었다.

황개가 주유에게 맞는 고육계를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조조를 속일 수 있었겠으며 조조의 백만대군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었겠는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민중은 인장(仁將)과 덕장(德將)을 따르기 마련이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신을 반기는 자를 위해 꾸민다고 한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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