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삼봉 정도전(1342~1398)

▲ 삽화=화가 최종국

황진이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삼년간은 자신의 비향(秘香)이 묻어나 남정네를 사로잡아야 했었고 자신이 쓴 시향(詩香)으로 천년의 세월을 녹여야 황진이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시격(詩格)이며 풍류라고 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첫눈 내리는 겨울,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하늘의 명(命)이 어디로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거대한 야망을 가진 한 대장부였다.

그는 평소 취중에서 한(漢)나라 고조가 장자방(張子房)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漢高祖) 유방을 택한 것이라 했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했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선택해서 조선 왕조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정도전은 새 왕조를 세우는 일을 하늘의 부름으로 알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첫날의 기운은 도도(滔滔)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대도(大道)의 기운이 울산 천지를 비추었다. 일출(日出)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계사년 새해 첫날 일출의 기운을 아녀자는 좁은 치마폭에 쓸어 담고 두 손으로 마음을 모아 축원을 드린다.

간절곶 새해 아침은 푸르고도 붉었다.

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정도전은 깊은 사색을 통해 역성(易姓)혁명의 대상으로 이성계를 택하고선 혼자 스스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그렸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우왕 10년이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건국과 그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개국 후에 6년을 살았지만 죽어서 600년 조선을 다스린 군자(君子)였다.

한양천도며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결정하였고 또 모든 궁의 문 이름을 직접 지었으며,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지어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였다.

그는 비록 고려를 버리고 새 왕조를 건국함에 있어서 간신의 이름으로 오래 불리기도 했지만, 경국대전의 기틀을 다져 조선 600년 반석의 틀을 세웠다.

고려말엔 왕도의 덕이 무너지고 대도(大道)가 이미 땅에 떨어졌고, 교사스러운 지혜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세상의 풍속이 나빠지고 사람들의 욕망이 끝이 없는, 마치 보통의 새들이 난(鸞)새의 자리를 탐하듯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시기에 정도전은 과감하게 이성계를 택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로, 그는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조선의 묵은 자취를 돌아보며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우주를 품은 한사람 군자(君子)였다.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 조선(朝鮮)을 개국한 장본인이었지만, 고종 때 비로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여 관직이 회복되었다.

우리의 역사, 조선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가슴 가득하다. 대숲 어디에선가 궁녀들의 치맛자락 소리가 달빛에 흐른다. 그리운 향기이다.

새해도 물과 같이 흘러간다. 우주를 마음에 품는 도도한 새해 아침이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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