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유령(劉伶)

▲ 삽화= 화가 박종민

유령(劉伶), 그와 술을 마셨다고는 하나 나는 술 맛보다는 그와 마시는 그 느낌을 마셨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와 함께 대작(對酌)하여 장면이 농익으면 그와 함께 한 시간도 농익는다.

유령의 ‘주덕송(酒德頌)’은 수 천 년 전의 문장이긴 하지만, 지금도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심상이 매력적이다. 나 자신은 겨우 술의 취미를 맛보는 정도의 ‘주도론’ 초단에 불과한 애주(愛酒)가 이지만, 마치 내 자신이 경험해 본 듯한 취중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가 유령과 함께 술상을 마주한 느낌이다.

하늘에는 술을 나타내는 별이 있고, 땅에는 술의 샘(酒泉)이 있고 사람에게는 맛 좋은 술을 즐기는 덕이 있다.

죽림(竹林)의 일곱 주선(酒仙), 그들은 입에 술을 머금고 술 안개를 피워냈다. 또한 술 바람을 일으키고, 술 비를 내리게 하면서 스스로 취하고 다른 사람도 취하게 했으며, 당시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후세 사람들까지도 취하게 했다.

그들이 남긴 풍격이 세상을 가득 채우면서 도연명이 나타나고 이태백이 나타났다고들 한다.

술의 역사는 수 만 년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존재를 이입하려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이 시작될 때부터 함께 하였던 것이다.

신에게 드리는 의식에서부터 출발하여 술에 취하여 어리둥절 자신을 망각함이 어쩌면 신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여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서 신선이 되어보는 것도 일상의 일탈일 것이니까.

술은 수많은 사고(思考)의 근원이다

조지훈의 ‘주도론(酒道論)’을 되짚어보면, 폐주(廢酒) 또는 열반주(涅槃酒)로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을 주도 9단으로 친다.

그렇다면 주도 9단에 걸 맞는 사람은 죽림칠현의 유령이 제격이다.

유령의 아내가 울면서 술을 너무 마시면 몸을 보전할 수 없으니 단주하라고 했다. 유령은 ‘내 스스로 끊을 수 없어 귀신에게 빌고 맹세해야 하니 술과 고기를 준비하라’ 하여 준비하니까, 유령이 꿇어앉아 빌기를 ‘한 번에 한 섬을 마시고 닷 말로 해정하게 하소서, 아녀자의 말은 들을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리고선 제주(祭酒)를 혼자 마시기엔 너무 싱거워 친구를 청해서 사흘을 연달아 마셨다 한다.

맹호도 한 잔이면 산 속에 취하고, 이무기와 용도 두 잔이면 바다 속에 잠든다는 두강주(杜康酒)를, 어느 대장부도 한잔이면 그만이라고 하는 두강주를 유령은 독으로 청했다.

술집 주인이 한사코 내어놓지 않았다.

그러자 유령이 ‘여기 봄놀이 나온 유령이 술집을 지나다 술 한독을 청했소. 고주망태가 되어도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소’라고 써 놓자 드디어 술 한독을 내 놓았다. 유령이 석 잔을 마셨는데 더 이상 마실 도리가 없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몸을 가누지 못해 일어서려다 술독을 깨고 말았으며 집에 돌아와 문필을 휘두른 적이 없는 그가 ‘주덕송(酒德頌)’을 지어놓고 나흘째 되는 날 쓰러져 죽었다. 그의 생애 유일한 문장이 주덕송이다.

유령, 그의 인생은 술이었다. 그는 술의 풍도(風道)로 죽림의 노님에 끼어들었다. 드디어 진(晉) 나라 죽림 7현에 끼어들었다. 항상 한 단지의 술을 들고 괭이를 멘 머슴을 데리고 다니며 ‘내가 죽거든 죽은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했다

유령, 그는 흉중에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심원한 우주를 담고 있었기에 인간의 세상을 초월할 수가 있었다.

‘주도론’ 초단에 불과한 이 몸이 권하노니 “종일토록 마셔 한껏 취하라”고 주신에게 감히 한잔 권하여 올린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느새 주신(酒神)이 되어 떠나고 없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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