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끝 안진경(顔眞卿) 709~784

▲ 삽화= 화가 박종민

시(詩)와 서예술(書藝術)은 동양문화의 예술적 사유에서 그 의미는 특별하다.

시(詩)적 미감과 예술적 형상에서 볼 때 시(詩)와 서(書)는 내적으로는 예술가의 정신과 정감, 심상과 관련을 맺으며 나아가선 동양 전통의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사유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예술을 창작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예술가의 심미세계가 드러난다. 예술의 형상성은 예술가의 풍부한 주관적 인식과, 심미적 사유가 다채로운 풍모를 지니게 될 때 예술가의 미감은 더욱 극대화 된다. 특히 심미적 예술형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체(書體)는 정신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장마철 구름의 틈새로 햇빛이 번뜩 쏟아져 들어온 석양빛, 낙조는 태화강 대숲사이를 뚫고 수면 속으로 접어 들어간다. 떠가는 구름은 시내를 감싸 흐르고, 도시의 저녁은 차분히 저물어 길손들은 가족의 품을 찾아 퇴근길이 분주하다. 날짐승들도 대숲에 보금자리를 두고 깃을 접는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할아버지 앞에 앉아서 천자문을 익혔다. 의미를 헤아리지도 못하고선 큰 소리로 따라 읽었던 추억이 있다.

그때 접해서 익히던 천자문이 안진경(顔眞卿)의 천자문 교본이었다.

안진경의 서체는 자형이 바르고 해서(楷書)의 표준에 맞아서 글씨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교본이라고 한다.

안진경의 해서체 서첩 교본으로 천자문을 익혔다는 사실이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호사를 누린 일인지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안진경은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켜 새 풍격(風格)을 이루었는데. 당시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한다.

그의 글씨는 남성적인 박력이 있으며 당대 이후의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인품과 충절에서도 추앙받은 그였기에 더욱 글씨가 역사에 빛남을 보여준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고 한다.

또 명나라의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는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진경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문가의 가훈 중에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으로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들 수 있다. ‘안씨가훈’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난세를 살아간 한 지식인이었던 학자 안지추(顔之推, 531~?)가 자손들에게 남긴 훈계서이다.

안진경은 안지추의 5대손이다. 그의 대표작은 안근례비문인데 비문의 주인공 안근례는 안진경의 증조부이다. 안진경이 이 비문을 쓴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필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쓴 글이라고만 알고 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안진경체가 탄생하기까지 안씨 집안의 글씨 내력은 대단하다.

안진경이 남긴 대표적 필적 세 가지가 있다. 제질문고, 고백부문고, 쟁좌위고를 가리켜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고도 한다.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이기에 우연한 본심 그대로의 필적이어서 자연적 묘미가 있어서 더욱 진귀하게 여겨진다.

다른 예술 분야는 밖으로 향하는 힘의 방향을 지니고 있다면, 서(書) 예술(藝術)은 안으로의 끝없는 세계로 파고드는 예술이다. 서예술에서 읽을 수 있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는 인품의 품격에 따라 다르다.

한글은 우리의 글이다. 하지만 한자도 우리의 글이다. 우리가 오래도록 써 왔으며, 그 안에 선인의 지혜와 가르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머리맡에 가까이 둔 안진경의 천자문 서첩을 자주 꺼내본다. 안진경의 필의(筆意)에서 우러나는 그윽한 묵향을 따라 명필의 혼을 읽는다.

참으로 고즈늑하고 행복한 저녁이다.

(그 동안 남성열전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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