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부끄러운 일까지도 기록했던 조선조
누군가 논란거리 지우려 사초를 없앴다면
공직자가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 못한 것

▲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사초 실종’ 문제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하다. 일부 사람들은 NLL문제를 그냥 덮자고 이야기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 그 중요한 문건이 사라지게 되었는 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검찰이 시시비비를 가려 한 점 의혹 없이 이번 사건을 정리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가능한 그 문제를 속히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미봉책으로 덮어 버린 문제는 시간을 두고 개인이나 조직 그리고 사회에 부담을 지우게 된다. 잠시 동안의 혼란이나 갈등 때문에 두고두고 갈등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 조선 왕조사를 연구하는 김준태 씨가 펴낸 <군주의 조건>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 조의 기록 문화에 대해 인상적인 부분이 등장한다. 요지는 조선 조는 기록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군주라 하더라도 사사로이 기록을 없앨 수 없었다. 군주도 인간인 까닭에 부끄러운 기록은 남기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지만 번번히 기록 담당 신하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사냥을 하다가 낙마를 한 일이 있었다. 이를 부끄러워 한 태종은 사관으로 하여금 낙마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말도록 지시한다. 무엄하게도 사관은 태종이 그런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는 사실까지 조선 실록에 기록으로 남겼다. 세상의 여러 나라 왕조들이 저마다 기록을 남기긴 하였지만 조선조 만큼 기록에 철두철미한 왕조는 없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김준태 씨는 “중국에도 실록이 있고 고려에도 실록이 있었지만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그대로 기록한 것은 조선의 실록이 유일하다”라고 전한다.

세종 때는 더 큰 일이 있었다. 세자빈이었던 봉씨가 폐서인 당하는 대형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봉씨가 궁녀들과 동성애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런 기록을 접하게 되면 뭐라고 할까를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에게 다른 죄목만 기록으로 남기고 동성애 부분을 빼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사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동성애와 관련된 기록을 고스란히 남겼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되는데 현종 때는 신하들과 언쟁을 벌리는 왕을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 화를 벌컥 냈다는 내용까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군주들은 극도로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게 된다. 자신의 언행이 어떻게 기록으로 남겨질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처신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록이란 면에서 조선조는 정말 독특한 왕조라 할 수 있다.

근래에 사초의 실종 가능성이 이야기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누군가 사초를 일부러 없앴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끄러운 언행을 없애 버림으로써 후일에 생길 법한 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활동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초라는 것이 자신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 사초를 없애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나라의 일을 담당하는 행위는 자신이 하지만 그것은 공적인 행위에 속한다. 공직자의 말과 행동, 특히 고위 공직자의 말과 행동은 공적인 것에 속한다. 특히 영토나 준영토와 관련된 공직자의 발언은 공적인 것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공적인 것에 해당한다.

조선조 왕들이 자신의 후일을 의식했던 것처럼 현대의 공직자들 또한 국민이 선거를 통해 위임한 권력의 행사를 상식과 윤리 그리고 도덕을 준수하여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과 그 밖의 법률이 정한 한계의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나는 이번 사건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지만 다시 한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함을 고위 공직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위임받은 권력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 말이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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