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을 느끼게 하는 리얼리즘

▲ <우유를 따르는 하녀> 캔버스위 유화, 45×40cm, 1658~1660년작,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삶의 방식을 나눈다면 이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의 방식으로 크게 구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젊은 시절의 삶의 방식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은 어른들의 삶이라 한다. 우리가 겪는 인생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도 이러한 경향을 갖고 오늘에 이른다. 곧 예술의 변화가 좋은 사례가 된다.

예술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종교성에 예속되어 이상성을 갖지만 현대의 역사로 진행되면서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의 주체적 시각과 현실적 시각을 갖고 발전을 해 온다. 이러한 의식이 만든 시대가 근대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러한 현상을 인류가 변화 발전하는 변증의 예시라 말하기도 하며, 현대의 미학자들은 이러한 현상과 논리를 미의식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곧 삶의 본질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현실세계에 있음을 역사가 반증하고 있다 하겠다.

미술의 역사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현상은 르네상스 시기의 전후로 나뉜다. 곧 르네상스 이후로부터 종교성이 가진 이상주의로부터 벗어난 미술은 인간의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으로 오늘날까지 줄곧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현상과 실체를 바탕으로 삼아 작품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작품들은 주체의식과 시민의식이 싹트는 시기와 함께 발전하여 비로소 기나긴 시간을 같이 해 온 종교적인 이상주의의 구속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작품경향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실주의’이자 ‘현실주의’인 ‘리얼리즘’이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이러한 작품제작 경향은 작가의 주관성을 억제하고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표현을 하고자 하였으며 모든 대상의 특질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주력하여 가시적인 자연현상과 현실의 다양한 삶의 현상을 충실하게 모사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때문에 그들의 그림에는 종교적인 환상적인 분위기나 혹은 문학적 상상이 배제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밀레나 도미에, 혹은 쿠르베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예시된 작품은 ‘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이다.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그릇에 따르는 우유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우유를 따르는 하녀의 육체적인 건장함은 생생하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은 자연스러워 마치 연출된 영화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벽면에는 못을 뺀 흔적과 해묵은 벽지의 흔적이 생활의 구체적인 흔적으로 느껴지며 빵의 질감은 점묘의 붓질에 의해 생생하다. 하녀의 강인한 어깨와 우유항아리를 든 드러난 팔뚝의 견고함은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밀레의 작품 ‘이삭줍기’와 비교를 한다면 많은 유사점을 발견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실체와 본질을 더욱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그림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은 왜 천상의 이상적인 삶을 버리고 지상의 현실적 삶을 본질로 삼아 삶과 존재의 참모습을 찾으려 하는지 묻게 하는 그림이다. 그림을 곰곰이 보고 있으면 그 답을 은근히 줄 것이라 여긴다.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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