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 중심의 교통정책 아직은 미흡
인도 통행 편의부터 보행거리 조성 등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정책 시작해야

▲ 정명숙 논설실장

예전엔 외국 여행을 가면 강변이나 도심 공원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산책을 하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왠지 부러웠다. 선진국이 돼야 저런 풍경을 볼 수 있나 싶었다. 선진국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꽤나 엉뚱하지만 우리보다 국민소득이나 문화적 수준이 높은 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울산에서도 그 같은 풍경이 낯설지 않다. 강변은 물론이고 도심 곳곳에서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굳이 산이나 들을 찾지 않더라도 바쁜 일상의 틈새를 이용해 도심에서 운동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도심 공기가 맑아지고 휴식공간이 많이 조성됐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러니 선진국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해도 영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도심 속 이동공간은 소득이 높아지면서 급속하게 차량 중심으로 갔다가 소득이 더 높아지고 더불어 문화 수준이 향상되는 선진국으로 접어들면 다시 사람 중심으로 재편된다. 인간 욕구의 흐름이 그렇다보니 정책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인 도시들도 수년전부터 혁신적인 도시디자인을 통해 보행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도 찻길 줄이기 공사가 한창이다. 일본 도쿄의 오모테산도는 ‘주차장 없는 상권’을 콘셉트로 재개발해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혼잡도로로 꼽히는, 타임스퀘어와 신세계·롯데백화점에 둘러싸인 영등포구 영중로도 3차선을 2차선으로 줄이고 보행로를 확대하는 ‘찻길 다이어트’를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브라에스의 역설’이 이론적 바탕이란다. 독일 보쿰루르대 교수를 지낸 디트리히 브라에스는 ‘도로를 줄이면 교통수요가 감소해 정체가 완화된다’고 했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지만 보행권 확보가 세계적 추세인 것만은 틀림없다.

신문의 보도를 참고하면 영국 런던의 박물관거리(exhibition road)는 신호등도, 표지판도, 경계석도 없다. 그렇다고 보행전용거리도 아니다. 차들은 시속 32㎞이하로 보행자와 함께 움직인다. 이 도로는 런던올림픽이 열린 2012년 이전까지만 해도 교통체증과 불편한 보행환경으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보행자와 차의 공존’을 목표로 491억원을 들여 왕복 4차선을 2차선으로 줄이고 바닥은 격자무늬로 도색했다. 보행자는 선을 따라 움직이고 차는 선을 가로지르게 되므로 속도를 줄이게 되는 시각적 효과를 도입한 것이다. 교통량은 30% 줄고, 관광객 1100만명이 찾는 거리로 거듭났다.

인간의 욕구는 생물이다. 보고 듣는 것, 아는 것이 많아지니 그만큼 욕구도 자란다. 집과 인도를 찻길에 내주던 시대에서 벗어나 어느새 우리는 강변뿐 아니라 가로수 그늘이 짙푸른 도심 인도에서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할 수 있는 도시를 원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연말 보도(步道)혁신 프로젝트로 ‘인도(人道) 10계명’을 내놓았다. 이용률 낮은 공중전화·우체통의 단계적 철거를 통해 인도를 비우고, 신호등 가로등 교통표지판 사설안내표지판을 모으고, 횡단보도 턱도 낮출 계획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주인인 거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울산에서도 보행자 중심의 도로·교통정책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일부 디자인거리나 문화거리라고 해서 보행 환경을 향상시킨 도로도 있다. 그러나 일부 구간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차량 속도제한을 낮추는 것으로 보행권이 확보될 일은 아니다. 상권 활성화나 차량 정체 해소를 위한 교통정책에 ‘사람 중심’이라는 그럴듯한 포장만 해놓았다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가로수, 가로등, 사설 안내 표지판, 간판, 자전거도로, 불법 주정차, 상가 앞 적치물, 노점상 등에 점령당한 인도를 되찾는 작은 일에서부터 산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아닌 도심을 관통하는 몇 갈래의 보행거리를 만드는 등,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보행 정책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정명숙 논설실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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