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옥 울산대학교 디자인·건축융합대학 시각디자인 전공 교수

공공장소인 벽이나 화면에 긁어서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뿜어서 흔적을 남기는 불법적인 낙서를 그래피티(graffiti)라고 부른다. 오래 전 인류가 벽화나 암각화를 통해 흔적을 남겼던 것처럼 그래피티도 일종의 자유로운 표현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피티의 어원은 ‘긁힌 자국’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어인 ‘Graffio’에서 유래되었으며 벽에 아픔과 분노를 심는 반 제도권적인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널린 알려진 그래피티라는 명칭과 표현 형식은 1970년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그래피티 작가들은 복잡한 도시 공간 속,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지하철이나 담벼락에 사회적 억압과 불만, 분노를 표현하는 추상적인 글씨와 낙서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래피티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장 미셀 바스키아와 키스핼링, 뱅크시를 들 수 있다. 바스키아의 원칙을 무시한 유희적이고 소박한 표현, 핼링의 단순한 선과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뱅크시의 기존의 시설에 낙서를 활용한 사회 풍자 정신 등 각각 그 특징과 개성이 뚜렷하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불법’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시작됐지만 결국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시하고 대중과 소통하며 생각을 공유하고자 했던 시도는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단속을 피해 몰래 그려야만 했던 그래피티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수많은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된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억압된 감정을 표출했던 낙서는 이제 모두가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래피티는 갤러리가 아닌 거리에서, 종이가 아닌 벽에서 이뤄지며 고정되어 있던 예술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나아가 캐릭터, 벽화, 실내그래픽, 로고나 픽토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소통의 매체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피티가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 시점에도 거리에는 제도와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욕망을 새롭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제기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대중 예술,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이규옥 울산대학교 디자인·건축융합대학 시각디자인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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