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한국과 일본 사이는 흔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라고 일컫는다. 지정학적으로 동해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로서 끊임없이 화전(和戰) 양면의 외교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양국 교섭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행사의 하나가 조선통신사의 파견이었다.

통신사는 조선 조정에서 일본에 보낸 공식 외교사절로서 파견횟수는 12회(1607~1811년)나 되고 규모는 300~500명에 이르며 왕복 6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이런 규모의 행차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여정을 통해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의 다양한 문화와 산천경개를 직접 관찰함으로써 상호간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행에 참가한 문신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기행시문을 남겼으니 ‘해행총재’(海行摠載)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글들을 통하여 당시 일본의 제반 상황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서쪽으로 머리 돌려 바라보니 눈길은 오히려 써늘한데

10리 송림과 7리 여울이 이곳이기 때문이네.

박제상(朴堤上)의 옛 충혼이 이제도 남은 듯하니

밤이 되면 꿈속에서 문안을 여쭈어야겠네.

回頭西望眼猶寒 十里松林七里灘

회두서망안유한 십리송림칠리탄

堤上舊魂今若在 夜來入夢問平安

제상구혼금약재 야래입몽문평안

이 시는 조선통신사의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姜弘重, 1577~1642)이 1624년 10월28일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박다(博多)의 냉천진(冷泉津)을 지날 때 지은 작품이다. 이국땅에 와서 계교로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고국으로 몰래 돌려보내고 자신은 충절을 지켜 화형당한 박제상의 혼령이 남은 곳을 지나면서 그에 대한 외경심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말의 정몽주와 조선 초의 신숙주도 거쳐 간 이곳에서 자랑스러운 선조의 넋을 기리고 있다. 요즘도 해외여행 중에 선조의 숨결이 어린 유적지를 만나면 숙연한 태도로 다시 그곳을 돌아보는 것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