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은 대체로 학교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식당이 따로 설치되지 않은 학교에서는 교실에서 식사하기도 하겠지만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간편하게 점심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도 유생 식당이 있었다. 성균관은 유생을 관내에서 숙식시키는 체제였으므로 거기에는 숙식과 관련된 각종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요즘의 대학생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고 식사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성균관 유생은 엄격한 식당예절을 준수해야만 하였다. 식당에 진입할 때는 생원과 진사가 나누어서 동문과 서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고, 나이순으로 자리에 나아가서 서로 짝을 지어 마주 앉도록 되어 있었다.

각각의 음식을 차리고 나서 ‘권반(勸飯, 밥 드십시오)’이라 소리치면
일제히 수저를 드는 것이 마치 서로 기다린 듯하네.
‘진수(進水, 물 올립니다)’, ‘퇴상(退床, 상 물립니다)’이라 차례로 외치고
‘기좌(起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라는 한 마디에 함께 내려오네.

每物旣供勸飯呼 齊持匙箸若相須
進水退床次第唱 一聲起坐下來俱

이 시는 조선 후기 문신 윤기(尹, 1741~1826)의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 중에서 식당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순서에 따라 식당에 들어가서 부목(負木)들의 구호에 따라 유생들이 함께 식사를 마친 다음 또 다시 구호에 따라 한꺼번에 그곳에서 나와 흩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딱딱한 식당예절을 성균관의 유생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거니와, 유생들이 거부하지 못한 까닭은 기숙하는 동안 식당에 간 사실을 도기(到記)에 기록하고 그 횟수를 헤아려서 다양한 혜택이나 제약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귀천을 막론하고 일정한 격식의 유지에는 공과에 따른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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