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체의 업무적합성평가 목적은
질병 앓는 근로자 솎아내기 아니다
적합한 업무로 건강한 직장생활을

▲ 김양호 울산대학교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이다. 내년부터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노동력의 주축인 핵심생산가능(25~49세) 인구는 2007년을 정점(2066만명)으로 이미 감소하기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장년 노동자들의 고용증가 추세도 나타나고 있다. 노동생애의 관점에서 보면 주된 일자리에서 평균 49세에 조기퇴직하고 평균 68세 은퇴까지 저임금 일자리를 반복하게 되는 현실에 처해 있다는 통계가 있다.

이러한 노동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경제수준의 발전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로 고혈압, 당뇨병, 고콜레스테롤혈증, 뇌졸중,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 골관절염 등 만성퇴행성질환이나 암의 유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을 하고 있는 중에 이러한 만성퇴행성질병이나 암에 걸리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현직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에 만성퇴행성질병이나 암을 앓고 있는 것이 비교적 흔한 일이 되었다. 또 질병이 악화되면 일을 쉬어야 하는 경우나 질병을 가진 채 복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추세는 더 진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을 앓고 나서 복직을 하는 경우나 질병을 치료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업무가 질병을 악화시키지 않을지 여부를 평가하거나 업무를 다소 조정하여 질병이 있는 상태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중재가 중요하게 되고 있다. 이를 ‘업무적합성평가’라고 하며, 주로 직업의학전문의가 수행하게 된다. 업무적합성평가는 처음 업무에 배치될 때도 중요하다. 단순히 질병이 있다고 일을 못한다고 판단해서는 안되며, 질병이 배치하고자 하는 업무에 얼마나 지장을 주는 지, 즉 업무와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과거에는 채용건강진단이 불건강자를 색출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으며, 간염보균상태가 공무원 채용의 결격사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채용건강진단은 불법화되었고 업무와의 적합성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어 질병이 있더라도 업무에 지장이 없으면 업무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업무를 할 수 있느냐 여부는 질병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질병이 그 업무에 지장을 주는가가 판단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질병이 있더라도 업무내용을 조정하거나 다른 업무에 배치하도록 하여 가능하면 고용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산업보건의 원칙이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질병을 이유로 고용을 하지 않거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 고용상의 결정은 단순히 질병유무로 판단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업무적합성 평가 결과에 근거하도록 하고 있다. 또 영국에서는 근로자들이 아프다고 병가를 낸 후 얼른 복귀하지 않으면 정부에서 훈련 받은 담당자가 그들을 접촉하여 상담을 하고 의사를 찾아가게 한다. 의사는 그들에게 질병진단서(sick note)가 아니라 업무적합서(fit note)를 작성해 주고 있다. 그들의 질병이 다시 재발하지 않고 건강하게 직장에서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긍정적인 관점에서 근로자를 대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성인 4명 중 1명 또는 5명 중 1명이 고혈압 또는 당뇨병 유병자인 오늘날 현실에서 사업주들이 건강진단상 한 가지 흠도 없는 건강자를 찾아 근로자로 채용하려 하거나 병가를 내고 치료를 거친 다음 직장에 복귀하려는 근로자를 다시 받기 꺼려 한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퇴행성질환을 보유하고 있는 근로자들도 평생 이 병들을 잘 관리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다 해낼 수 있다. 이들이 적절히 업무적합성평가를 받고 적합한 업무에 투입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김양호 울산대학교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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