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한 이완용
이완용의 영어 선생님인 미국인 헐버트
사제로 만나 애국-매국, 정반대 길걸어

▲ 한규만 울산대 명예교수 영어영문학

지금도 각국 대사관이 여럿 있는 서울 정동과 덕수궁 돌담길은 항상 정겹다. 이곳은 연인들이 자주 찾는 데이트 코스다. 그러나 이곳 덕수궁은 조선말기 고종이 신변위협을 당하며 국권을 침탈 당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다. 재위 기간은 1863~1907이다. 이 기간동안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조선 침탈 야욕이 가속화했고, 대내적으로는 왕가의 분열,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했다. 왕은 열강들 사이에서 외교적 노력과 대한제국 수립 선포 등으로 자주권을 지키려 했다. 1905년 일본군부의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고 신변위협을 무릅쓰며 저항했으나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고, 믿었던 미국은 일본의 조선강탈을 못본 척했다. 현재 한국은 대내적으로 정파가 극단 대립으로 치닫고 있고, 대외적으로 북한의 위협속에서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처지가 조선말기와 아주 흡사하다.

조선말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사람에게서 우리는 배울 점이 많다. 한 사람은 우봉 이씨로 지금의 성남시 백현동 땅에서 태어나 별 볼일 없는 양반 집안에서 유력한 인사의 양자로 입양된다.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어서는 매국노의 오명을 쓰고 가족에 의해 파묘되는 기구한 운명의 이완용이다. 후손들은 타국으로 도망가 살고 있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과 사법권 위임을 주도하고, 결국에는 1910년 경술년 한일병합을 밀어붙였다.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것은 위 세 반민족 사건에서 각료의 대신 및 총리대신으로서 모두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나름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완용은 과거시험에도 합격했고 우수한 영어능력을 인정받아 미국 대리공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전향하더니 최종적으로는 일본제국에 달라붙은 권력지향적 기회주의자 모습을 보였다. 주목할 일은 을사늑약에 찬성한 5적들이 모두 머리 좋고 입신양명한 법조인들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성공기준이지만, 그 성공이 선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입신양명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얼마나 위험하고 불행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 이완용이다.

또 한 사람은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고종이 만든 미국식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한국땅을 밟은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다. 육영공원에서 그는 이완용의 영어와 지리 선생님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선생과 학생은 애국과 매국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헐버트는 미국 선교사로 재입국해 기독교와 민주주의 가치관을 전파했다. 그는 고종의 외교고문으로서 해외 특사활동을 하다가 일본에 의해 추방당했으나 미국 내에서 한국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땅 양화진에 자신의 뼈를 묻었다.

그는 1950년 외국인 첫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2014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는데 한글의 우수성을 서양에 알렸고, 최초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한글자강 운동의 선구자였다. 2023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헐버트를 명예 한국 홍보대사로 임명해 달라고 정부기관에 요청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이었다. “한국의 은인 헐버트는 한민족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안중근 의사는 말씀하셨다. 국경을 초월한 헐버트의 인류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책무) 정신은 법꾸라지 이완용의 삐뚤어진 출세 지상주의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한국백성의 마음 속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한규만 울산대 명예교수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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