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저학년때부터 50년 넘게 함께 한
서로 익숙하고 변함없는 친구 자전거
애마 ‘겨울 나그네’ 타고 겨울로 출발

▲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이윽고 계절은 ‘소설(小雪)’을 지나 ‘대설(大雪)’로 가고 있습니다. 이때쯤 저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의 ‘겨울 나그네’를 즐겨 듣습니다. 진공관 앰프를 충분히 달구었다가 24곡의 노래 따라 내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 밤은 점점 길어질 것입니다. 해 뜨는 시간은 늦어지고 해 지는 시간은 짧아질 것입니다. ‘동지(冬至)’가 올 때까지 저는 겨울 나그네가 되어 서성이고 있을 것입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독일의 시인인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입니다. 슈베르트나 뮐러의 생애를 살펴보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슈베르트는 31살에, 뮐러는 33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슈베르트가 뮐러의 시에 많은 노래를 만든 이유가 비극적인 삶의 동류항에 강하게 이끌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200년 전 두 사람이 만나는 상상을 해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겨울 나그네가 성문 앞 보리수나무 아래서 만나는 상상도 해봅니다. 두 천재는 요절하였지만, 그들이 남긴 겨울 나그네는 이 계절만 되면 우리를 찾아옵니다. 푸른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겨울 나그네’를 친구들과 합창하고, 당시 모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가 한수산의 같은 제목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정처 없이 떠나곤 했습니다.

겨울에 접어들어 밤이 길어진다는 것, 아시아의 추운 밤이 찾아오는 그것이 한때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해 여름 학생들과 같이 떠난 중국 동북 3성 봉사활동에서 그곳에 아침이 새벽 3시쯤 너무 일찍 찾아오는 것을 보고 밤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러시아엔 밤이 오지 않은 ‘백야(白夜)’가 있고, 극지방의 겨울철에는 아예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가 있다고 합니다. 지구가 23.44도 기울어져 있는 까닭에 위도가 높은 남, 북위에 햇빛이 비치는 곳이 없어도 사람은 살아갑니다.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지만, 사람은 견뎌내는 존재이기에 위대합니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를 맞이할 때쯤 읽었던 어떤 글이 생각납니다. 지구에서 문명이 멸망한다면 ‘도서관’ ‘자전거’ ‘와인’ ‘콘돔’ 등 4가지가 전해진다면 인류는 다시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휴대전화기와 인공지능 AI가 주인공인 듯 활개 치는 요즘과는 다른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 낼 4가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여전히 긍정적입니다.

저는 요즘 그 4가지 중 ‘자전거’를 타며 겨울로 가고 있습니다. 그 자전거의 애칭을 ‘겨울 나그네’라고 부르며 함께 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자전거를 배웠는데 자전거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친구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50년이 넘게 서로에게 익숙하고 변함없는 친구로 지내는 것이 고맙습니다.

자전거 바퀴는 원입니다. 자전거 두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면 ‘무한대(∞)’가 무한대의 시간으로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자전거의 정체성 같습니다. 자전거가 보급된 이후 자전거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동차가 있고 오토바이가 있고,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전동 퀵보드’도 있지만, 자전거만큼 친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에게 친숙한 친구는 자전거입니다.

혹한이나 찬바람 속이 아니라 따뜻한 볕을 즐기며 당신과 자전거를 즐기고 싶습니다. 서로 무한의 바퀴를 굴리며 이 겨울 속을 달리고 싶습니다. 무조건 달리기보다 좋은 풍경을 만나면 잠시 내려 감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시간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진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애마 ‘겨울 나그네’와 함께 겨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연말연시를 지날 것이고, 건강하게 ‘소한(小寒)’ ‘대한(大寒)’을 지날 것입니다. 겨울을 지나 ‘입춘(立春)’이란 주소에 닿을 때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당신도 서둘러 출발해 주십시오. 어디서든 건강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당신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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